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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락가락하던 오후, 마르코의 주방은 여전히 차분한 기운에 감싸여 있었다. 마르코가 손톱을 물어 뜯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발소리가 천천히 그의 주방으로 다가왔다. 마음 한 구석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여기가 특별한 맛을 찾는 곳이라지?"
낯선 목소리에 마르코는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인물은 그의 옛 친구, 마일로였다. 그들의 관계는 오래 전에 끊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에 서 있었다. 마일로의 등장과 함께 주방은 얼마간의 침묵에 빠졌다.
"오랜만이야, 마일로." 마르코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뭐 가지고 왔어?"
마일로는 짧은 웃음을 지었다가 가죽 가방을 주섬주섬 열었다. 그 안에서 여러 개의 작은 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 병에는 손으로 쓴 라벨이 붙어 있었다. "여기 있는 건 특별하게 수집한 맛들이야."
마르코는 그의 눈길을 살짝 마일로에게 돌렸다. "자, 보여줘."
첫 번째 병뚜껑을 여는 순간, 달콤한 장미 향기가 주방을 감쌌다. 마르코는 코끝을 스치는 그 부드러운 향이 어느 계절에 속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것은 그저 향기도 아니었고 단지 맛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과 감정이 혼합된 복잡한 무언가였다.
"어디서 구한 거야?" 마르코가 물었다.
"어떤 할머니 기억 속에서. 그녀의 첫사랑과 같이 마셨던 홍차의 잔향이랄까." 마일로는 신중한 눈빛으로 병을 돌렸다.
마르코는 생각에 잠겼다. 이 맛이 되찾아야 할 '무엇'일 수 있을까. 그리고는 그 병을 내려놓고, 두 번째 병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스모키한 우드 향이 퍼졌다.
"또 다른 이야기?" 마르코가 물었다.
"응. 도시의 혼잡함을 뒤로하고 떠나는 여행길. 그녀가 말하길, 가장 자유롭게 느꼈던 순간이라더군."
주방은 잠시 고요해졌고, 마르코는 그 침묵 속에 사라진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부드러운 소리가 그를 현재로 다시 불러왔다.
"마르코."
뒤를 돌아보니 수아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곱슬머리는 비를 맞고 약간 젖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흘러간 시간의 향기를 지닌 듯했다.
"저도 대해 줄 수 있을까요, 오래된 기억의 맛을?" 그녀가 청자에서 차 한 잔을 따르며 물었다.
마르코는 수아의 질문에 미소로 답했다. "물론이지, 수아. 자리에 앉아."
그들의 대화는 작은 미로를 헤매 듯 계속되었다. 마일로와 수아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전례 없는 우연이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 마르코는 다시 병의 라벨을 바라보았다.
수아는 마일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기억의 공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일로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마르코의 시선이 다시 마일로에게 고정되었다. "왜 위험한 거지?"
아주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조용히 머물러 있는 주방. 마일로는 살며시 대답했다. "기억 속에서 길을 잃는다든지... 돌아갈 수 없다든지."
이 순간, 그들의 대화는 피할 수 없는 주제를 맞추게 되었다. 마일로는 눈길을 마르코가 아닌 수아에게 돌렸다. 그녀는 그가 무언가 중대한 고백을 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 속을 지나가며 알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마일로가 깊은 숨을 쉬었다. "니가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 안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
마르코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말의 무게를 음미했다. 뒤이어 뭔가 더 큰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그를 덮쳤다. 이 이야기가, 이 여정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잘 들어, 마르코." 마일로가 그를 응시했다. "널 기다리는 건 단지 잊혀진 맛만이 아니야. 더욱 크고 무거운 것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끝낸 마일로는 자리를 떠났다. 손목에 매달린 손수건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주방에 남은 그 묘한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간에서, 수아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을 때, 마르코는 그제야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문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주방의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그 하나의 ‘정답이 품어진 책’을 암시하는 듯 했다.
"마르코, 다음에 어떤 기억으로 들어갈 계획이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그가 무언가에 끌린 듯, 주방을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됐음을 암시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된 것이었어."
독자는 다음 이야기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어떤 답이, 어떤 진실이, 그 다음 장에서 펼쳐질지를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