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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여기,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의 엔진 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의 정적 속에서, 불현듯 피아노 선율이 파도소리 사이를 가르며 귓가에 흘렀다. 그렇다. 이곳은 음악가들이 한 시대의 전설을 남기기 위해 몰린 작은 요새, 단 한 번의 해가 진 후,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지도 모를 전설적인 바다 위의 공연장, '아쿠아 아레나'였다.
공연 전 너울너울한 무대 뒤에서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누구도 말을 걸지 못할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키다리 청년 하나가 무대로 남몰래 다가왔다. 얼굴이 반쯤 파묻힌 푸른 후드티와 닳아빠진 청바지, 꾸안꾸 차림의 그 청년은 마치 이곳이 자신의 안식처라는 듯 자연스레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의 손이 건반 위를 스치자마자, 공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했다. 그 파란 후드 속에서 뿜어져 나온 멜로디는 깊이 있는 물의 무게마저 녹아내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의 손을 지켜보았으며, 그 손끝에서 흐르는 소리에 몸을 비틀며 끌려갔다. 모두가 빠져든지 몇 순간 후, 청년은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는 더는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온 곳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시광장에서 매일같이 낮숙해진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 틈으로 바람결에 묻어나오는 음악.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재킷 깃을 여미며 지나치려 했으나, 발걸음은 점차저저히 낯선 감각에 매료되어 발목까지 주저앉게 되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이는 조용히 떠났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여기서도 당신의 손길이 닿은 거리죠."
그의 눈가는 희미한 비극의 일부를 품은 듯 보였다. 스위스 커피향과 부드러운 바람이 어우러진 거리에서 그는 가느다란 숨을 들이마시고, 그 특유의 어조로 군중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군중은 호기심으로 파닥거리는 그들의 영혼마저 맡기듯 환호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고자 했던 공연의 마지막 부분이 코앞에 다다랐을 노력의 절정에서 그의 손은 멈추고 말았다. 거센 바람 속에서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헤엄치듯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음?"
뒤편에서 의문의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창백한 피부와 머리에 가리어진 얼굴이 흩날리며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녀의 존재는 바람이 숲속을 쓰다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뭔가 숨겨진 비밀을 암시하는 듯했다.
"너, 그날 거기 있었지 않았어?"
여자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또렷하게 청년을 향해 물었다. 피아노 주변의 공기는 점차 희미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두 사람 주위에 얽혀들었다.
"기억나지 않아."
청년의 말은 여자의 차가운 시선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눈빛은 그 미소를 따라 흐려졌다.
"사람들은 절대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네 눈은 거짓을 못 가져."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폭풍 취주가락을 연상시키듯 길을 잃고, 청년과 여자의 존재는 바람 가운데서 점점 더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해변가에는 파도 소리와 함께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의 결말이 남아 있었다. 완성하지 못한 선율이, 끝내 다다르지 못한 그날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로.
폭풍의 중심으로 더 깊이 휘몰아쳐 가는 청년의 얼굴에는 잔잔한 웃음을 띄운 채, 음악과 함께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갈망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 저 너머 어딘가에는, 그와 같은 망각의 순간을 기억하는 또 다른 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진실을 간직한 채 연주를 듣고 있는가 하면, 한 편의 숨겨진 반주로 서서히 소리를 내는 울림은 내내 바다의 깊은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장이 시작된 듯한 음악의 조소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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