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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심연에서 온 심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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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방문에 숙소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문 밖에는 키 3미터에 육박하는 거한이 서 있었다. 육중한 갑옷이 그의 거대한 몸을 감싸고 있었고, 투구 너머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자하르의 그것과 흡사했다.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위압적인 기세가 문틈을 넘어 숙소 안까지 밀려들어 왔다.

루아는 자하르의 옆구리를 바싹 끌어당기며 자신도 모르게 활시위를 겨눴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라지크 무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 자체로 숲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압도적인 힘이었다.

자하르는 그런 루아를 보며 옅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익숙한 고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그러나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카엘, 네가 어째서 여기까지..."

자하르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그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거한은 투구 속에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하르 왕자. 천 년 전 저주에 걸려 잠식된 채 사라졌던 주제에, 이 인간 세상에서 이런 더러운 꼴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한, 카엘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의 시선은 루아를 향해 날카롭게 박혔다. 루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서는 오직 용족만이 내뿜는 냉혹한 긍지와, 인간에 대한 깊은 경멸만이 느껴졌다.

"이 지저분한 인간 계집과 함께 여기서 무얼 하는가? 용의 왕자가 인간과 어울려 다니는 꼴이라니. 천 년 동안 굳건히 지켜온 우리 용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다."

카엘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루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저분한 인간 계집이라니. 그의 시선은 자신을 벌레 보듯 하고 있었다. 루아는 자신을 지켜세워 주려 했던 자하르의 고백이 무색하게, 다시금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하르는 카엘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루아를 향한 모욕은 그에게 있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맹렬한 분노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카엘. 네놈이 감히 나의 신부를 모욕하는가? 명심해라. 루아는 나의 신부이자, 나의 저주를 풀 유일한 희망이다. 감히 그녀에게 한 치의 불경함도 보이지 마라."

자하르의 목소리는 숙소 안을 뒤흔들 만큼 강렬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얼마 전 라지크 무리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확고한 마력의 기세였다. 루아는 그의 결연한 태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려움 속에서도 자하르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싹텄다.

그러나 카엘은 그런 자하르의 경고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듯이 고개를 숙였다.

"신부라고? 웃기는군. 저 천하고 연약한 인간이 용족의 왕자비가 될 수 있을 리 없지. 자하르 왕자, 당신은 저주에 걸려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분명하다. 용의 피가 인간에게 더럽혀지는 것을 우리 용족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카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주변에서 묵직한 황금빛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숙소 안의 공기가 무겁게 짓눌렸다. 루아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카엘은 투박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용족의 진정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카엘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짓에 허공이 일그러지며 루아를 향해 거대한 압력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루아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이라기보다는, 자하르에게서 그녀를 떼어놓기 위한 강렬한 압박이었다.

"이 더러운 인간 계집을 내놓아라, 자하르. 우리는 너를 용족의 세계로 데려가 저주를 풀고, 다시 왕좌에 앉힐 것이다. 이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마라!"

루아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을 뻔했다. 자하르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자하르를 지키겠다는 일념만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카엘,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이 모든 고난 속에서 나를 지탱하고, 내가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루아다. 그녀만이 나의 유일한 길잡이다!"

자하르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카엘의 압력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맞섰다.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두 마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섬광을 일으켰다. 숙소의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카엘은 자하르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잠시 멈칫했다. 저주에 걸려 약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하르의 힘은 이전과 달랐다. 아니, 어쩌면 저주를 이겨낸 후 더욱 강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특히 그 인간 계집에 대한 맹렬한 보호 본능이 그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어리석군! 저주받은 용의 힘이 고작 인간에게 현혹되어 통제된다니! 이것은 용족의 수치다! 너의 저주가 풀리는 순간, 우리는 저 인간을 없앨 것이다. 네가 다시 용의 왕좌로 돌아오면, 그때는 모든 것을 잊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테니!"

카엘의 말은 자하르의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와 같았다. 저주가 풀리면 루아를 죽이겠다니.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하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안에 잠재된 용의 본능이 격렬하게 분노하며 깨어나려 했다.

"네놈의 입에서 또다시 루아를 해하겠다는 말이 나온다면, 나는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카엘."

자하르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황금빛으로 변했고, 그의 팔뚝에서는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숙소 안의 모든 물건들이 그의 마력에 짓눌려 부서질 듯 떨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루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왕자님..."

자하르는 루아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는 다시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폭주하려는 힘을 억누르며, 그는 루아를 자신의 등 뒤로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걱정 마라, 루아. 나는 너를 지킬 것이다.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루아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비늘이 돋아난 그의 피부가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는 그 어떤 것보다 따뜻했다.

카엘은 자하르의 변화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주받은 용의 왕자가 인간의 감정에 휘둘려 힘을 제어하는 동시에, 오히려 그 힘이 증폭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저주받은 용의 피가 순수한 인간의 사랑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흥. 고작 인간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성을 잃는군. 어리석은 자하르. 이 힘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너는 결국 본래의 저주받은 용의 모습으로 돌아갈 테고, 그때는 저 인간 계집이 너의 눈에는 하찮은 먹잇감으로 보일 테지."

카엘은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확신이 사라지고 미세한 동요가 섞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하르를 억지로 끌고 가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자하르는 그런 카엘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카엘. 나의 저주가 풀리든, 풀리지 않든, 나는 영원히 루아의 곁에 머물 것이다. 저주받은 용이든, 인간의 모습이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이 사랑이 바로 나의 새로운 저주이자, 나의 새로운 운명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의 저주를 짊어진 용족의 왕자가 스스로에게 내린 새로운 맹세이자,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선언이었다. 그의 선언과 함께 숙소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카엘은 자하르의 눈빛에서 거짓 없는 진심을 읽었다. 용의 심장이 인간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이 자리에서 자하르를 회유하거나 강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어리석은 선택이로군. 하지만 좋다. 네놈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겠다. 허나 명심해라, 자하르. 용족의 운명은 개인이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를 쫓는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테니. 너의 저주가 용족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고 있음을 잊지 마라."

카엘은 매서운 경고를 남기며 숙소 문을 나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숙소 안에는 다시 적막감이 흘렀다. 격렬한 전투는 없었지만, 그 어떤 물리적인 충돌보다 더 깊은 심장의 격돌이었다.

루아는 자하르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다시 푸른빛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용족의 다른 분들은... 대체 왜..."

자하르는 루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의 얼굴에 다시 옅은 미소가 번졌다.

"괜찮다, 루아. 저들은 나의 고모가 이끄는 '용족의 수호자'들이다. 내가 저주에 걸려 잠식되었을 때, 나의 피를 이용해 용족의 힘을 되찾으려 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저주가 용족 전체의 운명과 엮여 있다고 믿는 자들이지."

그의 설명은 루아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자하르의 저주가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용족 전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사건임을. 그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

루아는 물었다. 이제 그들은 그림자 추적자들뿐만 아니라, 자하르의 동족인 용족에게도 쫓기게 된 것이다.

자하르는 루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더욱 험난해질 것이다. 나의 저주를 풀고, 용족의 진정한 운명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할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지."

그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별들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에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용족의 압도적인 힘, 그리고 그들이 가진 비밀스러운 지식. 저주를 풀기 위한 진정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루아는 자하르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모험에 대한 설렘이 피어났다. 어떤 위협이 닥쳐오든, 그녀는 자하르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두 사람은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위협 속에서 더욱 견고해지고 있었다. 저주 너머의 진정한 사랑과 운명을 향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