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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이 먼저 덮쳐왔다.
문밖의 구둣발 소리가 멎는 순간, 서재 안의 모든 소리가 함께 죽어버렸다.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지지직거리는 소음마저 거짓말처럼 끊겼다. 25년간 멈춰 있던 시간 속으로, 살아있는 위협이 칼날처럼 파고든 순간이었다. 나와 준서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단단한 돌처럼 솟아올랐고,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구지? 김태준 비서인가? 아니면 아버지?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감각이 무뎌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찰나, 준서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소리 없이 카세트 플레이어의 전원을 끄고, 뚜껑을 열어 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방금 열었던 벽장 가장 깊숙한 곳, 낡은 앨범 더미 밑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그의 모든 동작은 훈련받은 맹수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바로 그때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육중한 문은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고 다정한,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린아. 안에 있니?”
한서 오빠였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던 바로 그 이름. ‘절대로 네 오빠를 믿지 마라. 특히… 한서를….’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온기 뒤에 숨겨진 서늘한 냉기가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파랗게 깨물었다. 준서가 내 앞으로 나서며,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듯 막아섰다. 그의 등은 산처럼 단단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서, 너도 같이 있는 거 안다. 문 열어. 할 얘기가 있어.”
한서 오빠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우리가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확신하고 있었다.
준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일렁였다. ‘어떡할 거지?’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열어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버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는 이미 이곳의 존재를 알고 찾아왔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쩌면 그 이상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좋은 말로 할 때 여는 게 좋을 거야.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온 걸 들키고 싶지 않다면.”
협박이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준서는 짧게 욕설을 읊조리더니, 결국 체념한 듯 문으로 다가가 낡은 열쇠를 돌렸다.
끼이익-.
오랜 세월 닫혀 있던 문이 불길한 신음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앞에는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 차림의 한서 오빠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의 눈동자까지 닿지 못했다. 그의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서재 안의 먼지 쌓인 풍경과 우리를 번갈아 훑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꼭꼭 숨어서.”
“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
준서가 날을 세우며 대꾸했다. 하지만 한서 오빠는 준서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등골이 오싹했다.
“하린아. 오빠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 요즘 네가 너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의 말이 진심 어린 걱정처럼 들려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어머니의 경고가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늘 나를 지켜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서재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훅, 하고 피어올랐다.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도 들었어. 많이 놀랐지? 그래서 네 방에 가봤는데 없길래… 혹시나 해서 와본 거야. 어머니께서 유독 아끼셨던 공간이니까. 너도 어쩐지 이끌렸을 것 같아서.”
그의 말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 폐쇄된 공간을, 어떻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오빠… 어떻게 여기가….”
“어머니께서 내게만 알려주신 비밀 장소 같은 곳이었거든. 힘들 때마다 오셔서 마음을 달래곤 하셨지.”
그는 먼지 쌓인 책상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칼날처럼 번뜩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런 낡은 물건도 있었네. 어머니께서 음악 듣는 걸 좋아하셨는데….”
그는 플레이어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안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알아차리기 힘든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찾고 있는 건 찾았니?”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뼈가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내가 애써 시치미를 떼자,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지. 하지만 하린아, 이것만은 기억해. 이 집안의 비밀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워. 섣불리 발을 들였다간, 너뿐만 아니라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그의 시선이 나를 지나 내 뒤에 서 있는 준서에게로 향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준서. 더 이상 하린이 부추기지 마. 네가 하린이를 위하는 길이 어떤 건지 잘 생각해 보라고.”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서재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과 먼지 쌓인 시간만이 남았다. 나는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준서가 그런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저 자식… 전부 알고 있어.”
준서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서 오빠의 마지막 경고는 우리를 위한 조언이 아니었다. 명백히, 이 판에서 손을 떼라는 최후통첩이었다.
서재를 나와 각자의 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지독하게 길게 느껴졌다. 복도의 모든 그림자가 나를 노려보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자마자,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서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한서 오빠의 경고가 뒤엉켜 끔찍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윤지훈, 그 사람의 핏줄이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걸… 절대로 알아서는 안 돼.’
‘절대로… 절대로 네 오빠를 믿지 마라. 특히… 한서를….’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윤지훈의 딸인가, 아니면 이 집안의 딸인가. 로켓 속의 아기는 누구이며, 나는 왜 그 아기를 대신해 ‘강하린’으로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서 오빠는 이 모든 사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적인가, 아군인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유일한 동아줄이, 실은 내 목을 조르는 밧줄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하녀가 은쟁반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김 비서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피곤하실 텐데, 따뜻한 차 한잔하시고 기운 내시라고….”
쟁반 위에는 고급스러운 찻잔과 함께, 작은 벨벳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하녀를 쳐다봤다.
“이건 뭐죠?”
“저도 잘… 비서님께서 꼭 아가씨께 직접 전해드리라고만 하셨습니다.”
하녀가 나가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벨벳 상자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불안한 예감에 휩싸여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상자 안에는 작고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용 디지털 음원 변환기가 들어있었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나 LP판의 음원을 디지털 파일로 복원하고 변환해 주는 최신 기기였다. 그 기기 밑에는 김태준 비서의 필체로 쓰인 작은 카드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온몸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손상되어 듣지 못했다는 것까지도. 한서 오빠가 우리를 찾아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김태준 비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선물이 아니었다. 조롱이자, 선전포고였다. ‘네가 뭘 하든 나는 다 알고 있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 보아라. 내가 허락하는 진실의 끝이 어디인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라.’ 악마가 내민 친절은 그 어떤 협박보다도 잔인하고 지독했다. 그는 내가 스스로 지옥의 다음 단계로 걸어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준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는 휴대폰 화면과 책상 위의 디지털 변환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나는 유일한 동맹이 내민 동아줄이었고, 다른 하나는 악마가 던져준 독이 든 사과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더 깊은 심연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김태준 비서가 보낸 그 기계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악마가 이 판을 깔았다면, 기꺼이 그 위에서 춤을 춰 주기로.
나는 그 기계를 들고 내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 준서의 방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더 이상 도망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방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내 손에 들린 작은 기계를 내려다보았다. 김태준 비서는 내게 무기를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총구의 방향이 누구를 향하게 될지는, 아직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