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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제19화: 거짓된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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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의 땀과 뒤섞여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준서의 방문 앞에 선 나는, 김태준 비서가 보낸 디지털 변환기를 마치 불발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방문은 저택의 다른 문들과 달리 어떤 장식도 없이 매끈한 흑단으로 만들어져,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거부처럼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기 직전,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악마가 깔아놓은 판 위로, 유일한 동맹일지도 모르는 그와 함께.

마음을 정하고 손을 들었을 때, 문이 먼저 안에서부터 열렸다. 잔뜩 날이 선 얼굴의 준서가 나를,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건 뭐야.”

그는 턱짓으로 내가 들고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그의 방 안에서는 희미한 스킨 향과 함께 어떤 감정도 배제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김 비서가 보냈어. 오래된 추억을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서 주는 ‘선물’이래.”

내 말에 그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내 손에서 변환기를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가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마치 독이 든 사과를 감별하는 사람처럼 신중한 눈길이었다.

“미쳤군. 이걸 쓰겠다고 가져온 거야? 그 뱀 같은 자식이 아무 대가 없이 이런 걸 줬을 리가 없잖아. 안에 도청 장치라도 심겨 있으면 어쩔 건데.”

“그럼 다른 방법은? 오빠가 찾았다는 방법은 뭔데?”

준서는 대답 대신 방 한구석에 놓인 자신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음원 복원 전문 업체의 홈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여기에 보내면 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게 가장 안전해.”

“시간?”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한테 시간이 어디 있어! 김 비서는 이미 우리가 테이프를 가졌다는 걸 알아. 한서 오빠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목을 조여오고 있는데, 며칠이고 넋 놓고 기다리라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내 외침이 방 안을 울렸다. 나는 그에게서 변환기를 다시 뺏어 들었다.

“이게 함정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어. 그는 우리가 진실에 다가가는 걸 지켜보고 있어. 조롱하면서, 즐기면서! 그렇다면 차라리 그가 깔아놓은 이 판 위에서 제대로 춤을 춰주는 거야. 그가 예상하지 못할 속도로,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준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노트북 화면과 내 손에 들린 변환기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격렬한 내적 갈등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젠장…!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해.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내용이 나오든, 절대 당신 혼자 흥분해서 날뛰지 마. 이건 더 이상 당신 혼자만의 복수가 아니니까.”

그의 말은 경고였지만, 동시에 기묘한 연대감을 품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았다. 어머니의 서재에서 몰래 가져온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와, 김태준 비서가 보낸 차갑고 세련된 디지털 변환기. 과거와 현재, 진실과 함정이 하나의 케이블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노트북 화면에 연결 신호가 깜빡였다. 준서가 마우스를 클릭하자,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복원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작은 막대그래프가 거북이처럼 느리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1퍼센트, 2퍼센트…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컴퓨터 팬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음과,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원 완료’라는 메시지와 함께 녹색 불이 들어왔다. 준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재생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나 역시 숨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클릭.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한층 더 선명하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너머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어머니의 절박한 목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테이프가 끊겼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한순간의 정적 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보다 훨씬 더 낮고, 겁에 질린 속삭임으로 이어졌다.

“……뭐?”

준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내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라고, 잡음 때문에 왜곡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명료하게 계속되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했다.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늘 다정했던 오빠, 나를 유일하게 감싸주던 그 한서 오빠가… 김태준의 사람이었다니.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 집안의 핏줄조차 아니었다니. 준서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스피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세계 역시 나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있었다. 테이프 너머로 그녀의 처절한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와 심장을 난도질했다.

쌍둥이.

나는 미끼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내 존재 자체가, 내 26년의 삶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 아니었다. 재벌의 ‘진짜’ 딸을 지키기 위해 버려진, 이름조차 없던 방패이자 제물이었다. 로켓 속의 아기는 윤지훈과 어머니의 딸 ‘강서아’. 그리고 나는… 나는 누구지? 이 지옥 같은 저택의 피를 이었기에, 언니를 대신해 이 모든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대체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옆에서 준서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의 손 역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우리의 어머니가, 그의 어머니가 저지른 잔인한 진실 앞에서, 그는 차마 내게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테이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지지직거리는 공허한 소음만이 방 안을 잠식했다.

햇살 보육원. 박 원장님. 모든 것이 시작된 바로 그곳에, 모든 것을 끝낼 해답이 있었다. 나를 키워준 그 자애로운 미소 뒤에, 이 모든 비극의 진실을 아는 또 다른 증인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차갑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슬퍼할 시간도, 절망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미끼였고, 내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쌍둥이 언니, 강서아를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어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명령이자, 나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찾아야 해.”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단단했다. 준서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 내 언니를 찾아야 해. 김태준과 한서 오빠보다 먼저.”

준서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나를 향한 경멸이나 적의가 없었다. 대신, 거대한 비극 앞에 함께 내던져진 동반자를 향한 복잡한 연민과 죄책감이 뒤엉켜 있었다.

우리는 다시 어머니의 유품이 담긴 나무 상자를 열었다. 이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물건들이었다. 나는 은제 로켓을 집어 들어, 그 안에 담긴 갓난아기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 내 언니, 강서아.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문득, 아기의 목에 걸린 것과 똑같은 로켓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그 옆, 아기를 감싼 강보의 한 귀퉁이에 수놓아진 아주 작은 무늬를 발견했다. 희미했지만 분명한, 날개를 펼친 작은 나비 모양의 자수였다. 별생각 없이 그 무늬를 손끝으로 쓸어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준서의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그의 목소리가 뱀에 물린 사람처럼 기이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내 손에서 로켓을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가, 사진 속의 작은 나비 자수를 미친 듯이 확대해서 보려 애썼다. 그의 동공이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왜 그래?”

“이 나비… 이 자수… 아니야. 이건… 이건 그냥 자수가 아니야. 이건… 우리 집안의 의사 가문에서만 대대로 내려오는 표식이야. 어머니의 주치의였던….”

그는 말을 멈추고 허둥지둥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첩을 뒤지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사진 위에서 멈췄다. 얼마 전, 그룹의 의료 재단 행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곳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준서와, 그의 옆에서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는 휴대폰 액정을 로켓 사진 바로 옆에 가져다 댔다. 사진 속 여자의 블라우스 깃에는, 로켓 속 강보에 새겨진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의 작은 나비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준서의 얼굴에서 모든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절망의 속삭임을 뱉어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수빈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