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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거짓된 이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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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여보.”

귓가에 달라붙는 ‘여보’라는 단어는 내 목덜미에 닿았던 그 어떤 칼날보다도 서늘했다. 온몸의 피가 순간 얼어붙는 듯한 착각. 내 어깨를 감싼 이안의 팔은 연인의 다정한 손길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지끈거리며 뛰었다.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살의가 등골을 타고 뱀처럼 기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숨 막히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겁에 질린 난민 영애 ‘아리아’의 가면을 썼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젊은 기사, 레오는 이안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시선은 얼어붙은 나에게서, 나를 단단히 감싸 안은 이안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올곧은 눈동자 속에서 굳건한 확신과 눈앞의 현실이 일으키는 혼란이 세차게 충돌하고 있었다.

“아… 그게, 저는….”

레오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술만 달싹였다.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근심과, 제국의 기사에 대한 정중한 예의가 완벽하게 배어 있었다. 연기력이 가히 일품이었다.

“제 아내가 무슨 실례를 했습니까, 기사님? 북부에서 험한 길을 내려오느라, 아직 수도 근방의 분위기에 익숙지 못해서요. 낯선 곳이라 겁이 많아졌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그는 나를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기며 보호하는 시늉을 했다. 그 치밀함에 구역질이 났다. 레오의 시선이 흔들렸다. 5년 전, 기억 속의 카일루스 황녀는 가녀리고 병약했지만, 그 눈빛만은 꺾이지 않는 자존심으로 빛나던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겁먹은 듯 고개를 숙인 여인은 그 기억 속 황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세월의 풍파에 닳고 닳아 빛을 잃은 모습. 어쩌면 그저 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한 듯합니다.”

레오는 마침내 고개를 저으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행차가 곧 있을 예정이니, 소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부인.”

‘부인’이라는 호칭이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이안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내 어깨를 감싼 채 몸을 돌렸다. 우리는 서둘러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등 뒤에 꽂히는 레오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위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여관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 사이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질척이는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 나는 수십 번도 더 이안의 등 뒤에 단검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방문이 닫히고 낡은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챙,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내 단검이 그의 턱 밑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의 숨통은 그대로 끊어질 터였다.

“여보?”

내 목소리는 독을 머금은 속삭임처럼 방 안에 낮게 깔렸다. 이안은 턱밑의 칼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단어 선택이었습니다만.”

“네놈의 그 잘난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누가 네게 그런 역할놀이를 하라고 허락했지? 내 정체가 탄로 날 뻔한 것보다, 네놈의 그 역겨운 연극이 더 참을 수 없어.”

“정체가 탄로 났다면, 당신과 나는 지금쯤 이 방이 아니라 진홍의 사자단 지하 감옥에 있었을 겁니다.”

그의 차분한 반박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기에 더 분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단검을 무시한 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기사의 이름은 레오. 평민 출신이지만 검술 실력이 뛰어나 알렉산더 경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된 자입니다. 충성심이 깊고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죠. 그가 만약 황녀 전하의 생존을 확신했다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죠. 5년의 세월이 흐른 당신의 모습과, 제가 만들어낸 ‘불쌍한 난민 아내’라는 상황이 그의 확신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린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는 마치 체스 판의 말을 복기하듯 상황을 분석했다. 내 살기 어린 분노마저도 그의 계산 속 변수 중 하나일 뿐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칼날에 실었던 힘을 아주 미세하게 풀었다.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시간을 벌었다고? 그의 눈은 속이지 못했어. 그는 반드시 황태자에게 보고할 거다.”

“하겠지요. ‘죽은 황녀와 닮은 여인을 보았다’ 라고. 황태자는 고지식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섣불리 군사를 움직여 소란을 피우기보다, 먼저 사람을 보내 진위부터 확인하려 할 겁니다. 우리에겐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이 도시를 빠져나갈 시간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아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단검을 거뒀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지금 이 도시를 뜨는 건, 오히려 우리가 첩자라는 걸 자백하는 꼴이야. 레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멍청한 짓이지.”

내 말에 이안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 팔짱을 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정면으로 부딪힌다. 황태자가 도착하면, 도시의 검문은 더욱 삼엄해지겠지. 우리는 그의 눈앞에서 가장 완벽한 ‘북부에서 온 난민 부부’를 연기하는 거야.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법이니까.”

내 계획은 무모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대담한 수이기도 했다. 적의 심장부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들의 의심을 정면에서 깨부수는 것. 내 안의 승부사 기질이 고개를 들었다. 5년간 지옥에서 구르며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리스크가 클수록, 돌아오는 것도 큰 법이다.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내 계획의 모든 가능성과 위험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낯익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군요. 그 파멸적인 대담함이 바로 제가 당신에게 투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 계획에 동의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이런 선택을 하리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이안 데 발레리우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교활한 남자였다.

***

다음 날, 세렌디아의 공기는 전날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황태자 아서 데 카이센의 도착은 도시 전체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휘감았다. 거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한 진홍의 사자단 기사들이 도열했고, 성벽 위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그려진 황실 깃발이 펄럭였다. 나는 여관 창문 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기억 속의 아서 오라버니는 언제나 땀 냄새와 쇠 냄새를 풍기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유독 서툴렀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동생을 챙기려 애썼던 사람.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강철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냉혹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5년의 세월과 곧 닥쳐올 전쟁의 무게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나의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제국의 한쪽 날개를 책임지는 황태자일 뿐.

“준비는 됐습니까, ‘아리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안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평범한 여행객의 옷차림이었지만, 품속에는 각자의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가 내민 것은 작은 나무 상자였다.

“이게 뭐지?”

“어젯밤 급하게 구한 겁니다. 마담 엘라라를 만나러 갈 때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정체’를 입증해 줄 물건이죠.”

상자를 열자, 안에는 낡고 빛바랜 작은 오르골이 들어있었다. 태엽을 감자,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시던 북부 지방의 민요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 생일 선물로 주셨던 물건. 5년 전 그날,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유일한 보물이었다.

“……이걸 어떻게.”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안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발레리우스의 정보망을 과소평가하지 마시죠. 아마 그날 강가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병사 중 하나가 빼돌려 시장에 내다 판 모양입니다.”

나는 오르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그리움이 뒤섞여 심장을 마구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르골을 품속 깊이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정적을 갈랐다. 나와 이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올 것이 왔다는 신호였다. 이안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었고, 나는 등 뒤로 단검을 옮겨 쥐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레오가 아닌, 훨씬 계급이 높아 보이는 진홍의 사자단 장교가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중무장한 기사 두 명이 버티고 있었다. 장교의 눈은 조금의 감정도 없이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북부에서 온 아리아와, 그녀의 남편 되는 자인가.”

그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이안이 한 걸음 나서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님?”

“황태자 전하의 명이시다.”

장교는 우리에게 한 치의 선택권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혔다.

“어젯밤, 레오 기사가 전하께 흥미로운 보고를 올렸다. 죽은 자와 꼭 닮은 여인을 보았다고.”

장교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그 시선은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전하께서는 그대들을 직접 만나, 그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신다.”

그는 턱짓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따라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