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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독사의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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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침실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독이자, 같은 세공사의 표식입니다.”

그 말이 내 뇌리에 박히는 순간, 발밑의 땅이 통째로 꺼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대신 이명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머니. 언제나 부서질 듯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고, 제국 최고의 의원들이 모두 그렇게 결론 내렸었다. 나 역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 내민 작은 은팔찌와 그의 말이, 지난 10년간 내가 진실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손바닥 위의 팔찌가 지독하게 차가웠다. 마치 죽은 자의 손목에서 막 풀어낸 것처럼. 나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헐떡였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가운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어 올랐다. 이건 더 이상 나만의 복수가 아니었다.

“……누가.”

내 목소리는 빗물에 젖은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누가 감히 내 어머니를.”

이안은 대답 없이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동요 없는 호수 같았지만, 그 깊은 곳에서 내가 느끼는 분노와 닮은 무언가가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이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인지, 그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는지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슬픔에 잠식당할 시간 따윈 없었다. 슬픔은 약자를 위한 사치일 뿐이다. 나는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오직 목표만을 보고 움직인다.

“네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나는 팔찌를 단단히 움켜쥐며 그에게 다가섰다. 내 눈빛은 칼날보다 서슬 퍼렜을 것이다. 이안은 내 살기에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후 폐하의 시녀 중 한 명이 독이 묻은 팔찌를 발견하고 알렉산더 경에게 비밀리에 전했습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부검을 강력히 반대했던 2황후 레안드라의 등살에 밀려, 증거는 힘을 잃었죠. 그 시녀는 며칠 뒤 실족사로 위장되어 발견되었고요.”

“스승님은… 알고 계셨군.”

알렉산더 경. 그는 언제나처럼 진실을 좇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지하 감옥에 갇혔다. 모든 조각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레안드라. 그 여자는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 했으며, 이제는 제국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왜 이걸 이제야 말하는 거지? 처음부터 알았다면, 계약 조건이 달라졌을 텐데.”

“정보는 타이밍이 생명입니다, 그림자 님. 너무 이른 진실은 사람을 무모하게 만들지만, 절벽 끝에서 마주한 진실은 사람을 날아오르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그의 궤변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남자, 이안 데 발레리우스는 내 분노마저 자신의 계획을 위한 연료로 쓰려는 속셈이었다. 위험한 남자. 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 위험함이 필요했다.

“시체들을 처리한다. 흔적은 남기지 마.”

나는 차갑게 명령하고 몸을 돌렸다. 자객들의 시신에서 값나가는 것들을 수거하고 오두막 안에 쌓았다. 이안은 말없이 기름통을 가져와 시신과 오두막 전체에 뿌렸다. 우리가 함께 불을 붙이자, 낡은 오두막은 탐욕스럽게 불길을 삼키며 타올랐다. 붉은 불길이 비에 젖은 숲을 환하게 비췄다. 나는 그 불빛에 비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손. 나는 이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리라 다짐했다. 어머니의 원수, 나를 버린 제국, 그리고 나의 과거까지 전부.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길을 떠났다. 밤새 내린 비로 길은 엉망이었지만, 마차는 묵묵히 수도를 향해 나아갔다. 마차 안의 공기는 어제보다 몇 곱절은 더 무거웠다. 나는 창밖을 보는 척하며, 어젯밤의 사건과 이안이 던진 새로운 진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적은 단순히 2황후 레안드라와 2황자 에반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는 더 거대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 어머니를 독살하고, 황태자의 최정예 기사단을 사칭해 나를 죽이려 할 정도의 세력. 그들은 제국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독사였다.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이안은 고삐를 쥔 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단순히 ‘죽은 황녀의 귀환’이라는 충격 요법만으로는 부족해. 무대 위로 화려하게 등장해봤자, 관객석에 숨은 암살자의 독침에 당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독사의 머리를 찾아 먼저 잘라내야지.”

“그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니. 하지만 냄새는 추적할 수 있겠지.”

나는 움켜쥔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는 어젯밤 자객에게서 빼앗은 은팔찌가 흉터처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이 독과 이 세공사. 이게 첫 번째 실마리다. 수도에 도착하면 황궁으로 가지 않아. 뒷골목의 쥐새끼들부터 만나봐야겠어. 제국에서 가장 은밀하고 값비싼 정보를 거래하는 자가 필요해.”

내 말에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미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 혹은 내가 그런 결론을 내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담 엘라라’를 찾아가시면 되겠군요.”

“마담 엘라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5년간 용병으로 활동하며 대륙의 굵직한 정보상들은 전부 꿰고 있었지만, 그 이름은 생소했다.

“수도 아카시아 로에 위치한 최고급 장신구점 ‘라 루나’의 주인이죠. 하지만 그녀의 진짜 상품은 보석이 아니라 비밀입니다.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부터 제국의 안보와 관련된 기밀 정보까지, 돈만 지불한다면 신의 계획이라도 훔쳐다 줄 여자죠. 물론, 그녀의 신뢰를 얻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해. 그녀를 만나겠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는 신원이 불분명한 자는 절대 만나주지 않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수도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죠.”

“그럼 네가 약속을 잡으면 되겠군. 발레리우스 대공가의 이름이라면,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겠지.”

그러자 이안이 처음으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조금 복잡합니다. 마담 엘라라와 발레리우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껄끄러운 관계라서요.”

그의 애매한 대답에 미간이 좁혀졌다. 이 남자에게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았다. 하지만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믿지 않는 관계. 중요한 것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였다.

“그럼 내가 직접 뚫는 수밖에. 오히려 좋아. 정체를 숨기기엔 그편이 더 나을 테니.”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제국의 심장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었다. 거대한 음모의 실타래를 푸는 전쟁의 서막이었다.

***

이틀 뒤, 우리는 수도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 도시인 ‘세렌디아’에 도착했다. 이안의 말대로 도시는 혼돈 그 자체였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진홍의 사자단과 2황자를 지지하는 푸른 매 기사단이 도시를 반으로 나눠 대치하고 있었고, 그 사이를 온갖 소문을 실어 나르는 상인들과 살길을 찾아 몰려든 난민들이 위태롭게 채우고 있었다. 퀴퀴한 땀 냄새와 싸구려 술 냄새, 길거리 음식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일단 묵을 곳부터 정하지.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내가 말하자,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인파 속으로 마차를 몰았다. 우리는 도시 외곽의 허름하지만 깨끗해 보이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이안은 정보를 수집하겠다며 잠시 밖으로 나갔고, 나는 방에 남아 앞으로의 계획을 세밀하게 다듬었다. 마담 엘라라를 만나기 위한 사전 준비, 그녀를 설득할 거래 조건, 그리고 실패했을 경우의 대안까지.

몇 시간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집어 들고 문으로 다가갔다.

“나다.”

이안의 목소리였다. 경계를 풀고 문을 열자, 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 도시에 곧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국경 시찰을 마치고 수도로 복귀하는 길에, 이곳의 군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행차하시는 거라고요.”

“아서 오라버니가? 잘됐군. 그 고지식한 인간이 오면 적어도 길거리에서 칼부림 나는 일은 줄어들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에 진홍의 사자단 놈들이 기고만장해져서 도시 전체를 들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2황자파의 첩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통행인들을 무작위로 검문하고 있어요.”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검문. 내 얼굴을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황족의 얼굴은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이곳을 떠야 하나?”

“아니. 지금 움직이는 건 더 위험합니다. 이미 도시의 모든 관문은 통제에 들어갔을 겁니다. 내일 아침, 황태자가 도착하고 검문이 느슨해질 때까지 최대한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합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우리는 꼼짝없이 여관에 갇힌 셈이었다. 나는 창문 틈으로 떠들썩한 거리 풍경을 내다보았다. 붉은 망토를 두른 진홍의 사자단 기사들이 거들먹거리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저녁거리라도 사 오지.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으니.”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이안이 말리려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방을 나섰다. 잠시라도 바람을 쐬지 않으면, 이 불안감과 분노에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시장은 여관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따뜻한 빵과 말린 고기 몇 점을 사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시장 한복판에서 시비가 붙었다.

“이 더러운 놈이 감히 신성한 제국 기사의 갑옷에 손을 대?”

진홍의 사자단 소속으로 보이는 기사 하나가 행상의 좌판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나이 든 행상은 바닥에 나뒹구는 과일들을 보며 울상이 되어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못 보고 부딪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네놈 같은 버러지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기사가 칼을 뽑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다. 내게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이런 사소한 불의에 휘말릴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젊은 기사 하나가 그의 팔을 막아서며 나섰다.

“그만하게, 에릭! 황태자 전하께서 곧 오시는데,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기는커녕 폭력을 행사해서야 되겠나!”

“닥쳐, 레오! 이건 군 기강의 문제야!”

레오라고 불린 젊은 기사는 완고했다. 그의 설득에 에릭이라는 기사는 마지못해 칼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뒤에서 급하게 달려오던 아이와 부딪히면서, 내 머리를 가리고 있던 후드가 뒤로 훌렁 벗겨졌다.

“아! 죄송….”

사과하려던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방금 전 기사들을 말리던 젊은 기사, 레오가 나를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았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간신히 소리 없는 형태를 만들었다.

카… 일… 루… 스….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 등 뒤에 달라붙어 있었다.

‘젠장, 들켰나?’

그가 소리라도 지르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인파를 헤치며 여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나지막이,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혹시….”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여기서 돌아보면 끝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5년 전 실종되신, 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진퇴양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내 손이 허리춤의 단검으로 향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팔이 강하게 둘러졌다. 그리고 익숙하지만, 지금은 소름 끼치도록 낯선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리아.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여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이안이 너무나도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젊은 기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제 아내가 무슨 실례를 했습니까, 기사님? 북부에서 피난 오느라, 아직 수도 분위기에 익숙지 못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