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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차가운 그림자, 따뜻한 온기,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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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의 차가운 눈빛과 위협적인 목소리가 내 귀에 맴돌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그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이곳은 다시는 오지 말라는 그의 말은, 마치 그 방과 사진이 가진 비밀을 영원히 묻어두라는 무언의 명령처럼 들렸다. 그는 내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 들고는, 그것을 품 안에 넣은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 발은 마치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나를 꿰뚫어 볼 듯했다.

"다시는… 이곳에 발 들이지 마." 그의 마지막 경고는 마치 얼음송곳처럼 내 심장을 찔렀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낡은 문을 세게 닫고 방을 나섰다. 쾅, 하는 굉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휘청이며 벽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에 들려 있던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그 뒤에 쓰인 흐릿한 글씨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린아, 엄마는…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왜 어머니는 나를 버려야 했고, 왜 25년이 지나서야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난 걸까. 그리고 준서는 왜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걸까.

나는 한참을 그 어두컴컴한 방에 서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더 이상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방에 깃든 슬픔과 비밀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이곳이 오랫동안 버려진 공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안에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준서가 나에게 했던 차가운 말들은 나를 재벌가의 딸이 아닌, 그들의 비밀을 침범한 이방인으로 낙인찍는 듯했다. 내가 발을 들인 곳은 단순한 부유한 집이 아니라, 거대한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미로 같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방을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고요했지만, 내게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익숙해질 법도 한 호화로운 방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푸른 풍경조차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 집에서 정말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나는 이 집의 비밀 속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그날 오후,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사 시간도 놓쳤고,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 어쩌면 준서가 아버지나 한서에게 내가 저 방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이 집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의 따뜻한 환대 뒤에는 분명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움찔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한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따뜻한 차와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하린아, 점심 안 먹었다며. 걱정돼서 와봤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그 목소리 덕분에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며 어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 괜찮아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한서는 내 방으로 들어와 쟁반을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여."

그의 따뜻한 시선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준서와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할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이 집에 대한 나의 불안과 궁금증을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다.

"오빠…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뭔데? 뭐든 말해 봐." 한서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머니… 그리고 저요. 왜… 저는 25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살아야 했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신 ‘불미스러운 일’이 대체 뭐였어요?" 내 목소리는 떨렸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진실을 요구했다.

한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슬픔, 후회, 그리고 어딘가 모를 미안함까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린아… 그건… 우리 모두에게 아픈 이야기야. 네 어머니는… 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를 잃어버리게 됐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어딘가 무거웠다.

"잃어버리다니… 그럼 그냥 버려진 게 아니라는 거죠?" 내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나를 버린 부모를 미워하며 살아왔는데, 잃어버렸다는 말은 내 지난 25년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응. 절대 버린 게 아니야. 아버지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충격과 죄책감으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어. 그리고 네가 실종됐다는 소식에…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지. 너를 찾는 건… 아버지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어." 한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부모가 사실은 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 준서는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준서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한서가 그 방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방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서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준서는… 좀 그래.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네가 사라진 후로… 준서가 많이 힘들어했어. 준서는 네 어머니를 정말 많이 따랐거든.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자랐어. 아마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시절의 상처가 다시 떠오른 것일 수도 있어. 네 존재가… 그에게는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것일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서의 차가움 뒤에 그런 슬픔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의 태도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깊은 상처가 나를 향한 적대감으로 표출되는 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싫은 건… 어쩔 수 없네요."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한서는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이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미안해, 하린아. 준서 대신 내가 사과할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우리 가족은 네가 필요해. 네가 오기 전까지는… 늘 어딘가 비어 있는 것 같았거든."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 말에 나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25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이라는 온기. 그 온기가 내 안에 스며들어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그때, 문득 한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봤다. 그의 시선은 내 방 문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따라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그 너머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빠, 왜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저녁 식사 전에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네 방에 필요한 물품들을 좀 더 채워줄까 생각 중이었어. 옷 같은 것도 새로 사야 할 테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 준서가 서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 거대한 저택 안에서 나는 늘 누군가의 시선 아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서가 방을 나서자, 나는 다시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한서의 말대로 준서의 적대감은 그의 깊은 상처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숨겨진 방과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미안하다’는 글씨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상처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한서가 마지막에 보였던 그 불안한 눈빛. 그 또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잠시 잠에서 깨어났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향했다. 넓은 복도를 지나는데, 저택의 정원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정원에 있을 사람이 있을까? 혹시 준서일까? 그의 수상한 행동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정원 쪽으로 향했다.

불빛은 저택의 뒤편, 잘 가꾸어진 작은 온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온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준서가 서 있었다. 그는 정성스럽게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놀랍도록 섬세했고, 식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낮의 차가움과는 전혀 달랐다. 깊은 슬픔이 담긴 듯한, 어딘가 연약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때, 준서가 작은 화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화분에는 잎이 시들어가고 있는 작은 꽃 한 송이가 심겨 있었다. 그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엄마… 미안해요…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어…"

쿵, 하고 내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엄마? 준서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시들어가는 꽃 앞에서. 이 꽃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지키지 못했다는 걸까? 그의 말은 내가 찾은 어머니의 사진 뒤에 쓰인 글귀, ‘하린아,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과 묘하게 겹쳐졌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슬픔이 담긴 눈빛,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이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준서의 비밀, 어머니의 비밀, 그리고 이 집의 비밀이 한데 얽혀 나를 더 깊은 미로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내가 발을 들인 이 재벌가는, 단순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그들의 감춰진 그림자를 건드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