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첫 만남, 조용한 페이지 사이에서
도서관은 오후 햇빛이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대에만 갖는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 나무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그 사이로 떨어지는 빛은 유리창에 부드럽게 반사되어 바닥 위로 옅은 노란 기운을 뿌렸다.
재현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특유의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장들이 뿜어내는 차분한 향이 섞여 있었다.
그 향은 항상 그를 안정시켰다.
사진 작업이 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면 그는 종종 이런 조용한 장소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그가 찾는 건 ‘도시의 오래된 구조물’을 다룬 사진 자료.
도서관 직원이 알려준 번호는 770번대, 사진술과 예술 서적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그쪽 섹션으로 걸어갔다.
높은 책장 사이로 햇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먼지 입자가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한가운데, 누군가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하린이었다.
아직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
그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사람.
그녀는 770번대 책등을 꾸준히 따라가며 목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얀 니트 소매가 자연스럽게 팔목까지 내려와 있었고,
오른손에는 작은 포스트잇 묶음을 들고 있었다.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붙이려는 것이겠지.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재현은 그게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재현은 조용히 뒤쪽 칸에 있는 다른 책을 찾는 척하며 잠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다시 그녀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녀의 동작이 불필요하게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고,
또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그는 혹시 방해가 될까 최대한 소리 없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책 끝을 스칠 때,
자그마한 찰칵 소리가 났다.
그 소리 때문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아… 어…”
하린이 작게,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재현은 순간적으로 놀라서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가까이… 소리가 좀 크게 났죠.”
하린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런 소리는… 도서관에서 흔하죠.”
부드러웠다.
그 말투도, 표정도.
재현은 그녀가 보고 있던 책 등 사이를 확인하며 손을 뻗었다.
찾고 있던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없네.”
하린이 그의 말에 반응하듯 책을 들어 보였다.
“혹시… 이거 찾으시는 건가요?
《도시의 오래된 벽, 시간의 구조》… 이런 제목이었죠?”
재현은 놀란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아, 네… 맞아요. 그 책이요.”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근데 먼저 보세요. 제가 기다릴게요.”
하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필요 부분만 확인했어요. 가져가세요.”
책을 건네받는 순간,
손끝이 진짜 스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근접해 있었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아… 감사합니다.”
재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린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 다시 책장을 향했다.
그녀의 움직임 속에는 여유로움이 있었고,
도서관을 자신의 공간처럼 편안히 사용하는 사람 같았다.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계속 눈으로 따라갔다.
잠시 후, 그녀가 다른 책등을 살피던 중
재현이 들고 있는 카메라 스트랩이 밖으로 살짝 드러난 걸 본 듯,
그녀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사진 찍으시는 일… 하시나 봐요.”
재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진 촬영도 하고, 디자인 쪽도 조금 하고… 그래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등을 한 번 스치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 책 찾으시는 거군요.”
그 말은 ‘당신을 잘 알아요’가 아니라
‘방금 보니까 그렇겠구나’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과하게 가까워지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재현은 책을 들고 조심스레 그녀에게 되물었다.
“혹시… 이런 쪽 좋아하세요?”
“예술 쪽이요?”
하린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좋아한다기보단… 조용해서요. 이런 책들은.”
“…맞아요.”
재현도 무의식적으로 낮게 웃으며 말했다.
“조용한데… 오래 남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좀 그래요.”
하린은 말 대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둘 사이에 또 잔잔한 공백이 흘렀다.
어색한 건 아닌데,
괜히 더 말을 붙이기에는 아직 멀고,
그래서 괜히 자꾸 신경 쓰이는 그런 거리.
하린이 먼저 책을 들고 뒷걸음으로 한 발 물러났다.
“더 찾아봐야 해서…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책도.”
“별말씀을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가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재현은 책을 펼쳐보려 했지만,
글씨가 이상하게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눈앞 책장에 팔꿈치를 얹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책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방금 하린이 창가 쪽으로 걸어가던 뒷모습만 계속 생각났다.
한편,
창가 쪽으로 간 하린 역시 책을 펼치는 순간 멈칫했다.
마지막에 나누던 그 짧은 대화의 느낌이 자꾸 떠올랐다.
특별한 말도 아니었고, 특별한 표정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오래 남았다.
‘…낯선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도서관은 여전히 조용했고,
두 사람의 동선은 더 이상 겹치지 않았으며,
대화도 단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몇 마디가
책 한 장처럼 머릿속에 정확한 자리를 차지했다.
누군가의 첫 장이 그렇게 천천히,
그렇게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