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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남자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라졌다.
눈에 띄지 않게 그를 관찰했다. 나이는 오십 중반쯤 되어 보였고,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쯤 물들어 있었다. 체격은 딱 봐도 무인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다부졌고, 웃는 얼굴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이 숨어 있었다. 외교 특사라고 했지만, 저 눈은 상인이나 외교관의 눈이 아니었다.
'저 사람, 위험하다.'
원작 소설을 떠올려봤다. 8화, 9화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외국 특사가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또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원작을 읽은 건 퇴근 후 지하철 안에서였고, 솔직히 황제와 악녀의 로맨스 라인만 집중해서 봤지 조연들을 일일이 외워두진 않았다.
'이은서, 너 진짜 복선 회수를 못 하는 독자였구나.'
속으로 자책하는 사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라에르 공작, 먼 길을 오셨습니다. 여독은 풀리셨는지요."
"폐하의 황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피로 따위가 남아 있겠습니까."
라에르 공작.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딘가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는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잔잔한 호수처럼, 모든 걸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라에르 공작의 시선이 천천히 내 쪽으로 흘러왔다.
"이분이 바로 소문으로 듣던 한세아 공녀이십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악녀답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허, 소문보다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그리고…" 그가 잠깐 말을 끊었다. "강단 있어 보이십니다."
칭찬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냥 미소만 돌려줬다. 세아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마 차갑게 한마디 잘라냈겠지. 하지만 나는 굳이 적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황제가 슬쩍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뭔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내 시선을 내려깔았다.
식사가 시작됐다. 라에르 공작은 식사를 하는 내내 황제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날씨, 황궁의 건축, 황도의 번화함 같은 주제들이었다. 전형적인 외교적 대화였다. 아무 내용도 없는 것 같으면서, 사실은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며 귀를 열었다.
"그런데 폐하, 이번 회담의 주제가 단순한 교류에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북방의 일도 있고, 이참에 제대로 된 조약을 맺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황제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멈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봤다.
"조약이라 하시면?"
"물론 양국에 이로운 방향으로요. 특히…" 라에르 공작이 다시 나를 봤다. "황실의 안정을 위한 협력이라든지, 그런 것들이요."
황실의 안정. 그 단어가 공중에 떠올라 천천히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뭐야. 저게 나한테 하는 말인가?'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라에르 공작은 충분히 이해하는 듯 더 이상 그 주제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공작이 자리를 떠났을 때, 나는 한숨을 내뱉을 타이밍을 잃어버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세아 공녀."
황제가 불렀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네, 폐하."
"방금 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소?"
돌직구였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적당히 둘러대야 할까. 황제는 내가 뭔가를 숨기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들킬 거라면.
"위험한 사람입니다."
황제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근거는?"
"외교관치고 눈빛이 너무 날카롭습니다. 웃는 얼굴 뒤에 뭔가를 계산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잠깐 망설이다 이어갔다. "'황실의 안정'이라는 말을 꺼낼 때 저를 봤습니다. 그건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나를 바라봤다. 뭔가를 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에 놀란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가 원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라는 존재는 늘 겹겹이 층이 져 있어서,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서부터가 연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역시 당신은." 그가 낮게 말했다. "눈이 밝소."
"살아남으려면 밝아져야 하니까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황제의 눈가가 아주 살짝 부드러워졌다. 웃는 것과 웃지 않는 것의 경계 어딘가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드는군."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가 말했다.
"내일 아침, 다시 봅시다. 드릴 말씀이 있소."
그리고 그는 나가버렸다. 또 이렇게. 늘 뭔가를 반쯤 던져놓고 가버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텅 빈 식당에 혼자 남아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봤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요? 그게 뭔데요, 황제 폐하.'
촛불이 흔들렸다. 창밖으로는 바람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나는 빈 의자를 바라보며 오늘 저녁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렸다.
라에르 공작의 눈빛. 황제의 침묵. 황실의 안정이라는 단어.
'북방. 조약. 황실의 안정.'
퍼즐 조각들이 어딘가에서 맞춰지려는 것 같았는데, 아직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원작을 더 꼼꼼히 읽어뒀어야 했는데. 퇴근길 지하철에서 졸면서 대충 훑어본 과거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은서, 그때 스크롤 좀 천천히 내렸어야 했잖아.'
방으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시녀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지나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 시녀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걸렸다. 접힌 종이 한 장.
"그거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시녀가 흠칫 놀라며 멈췄다.
"아, 공녀님. 이건 그냥 심부름으로…"
"누가 시켰어요?"
시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억지로 뺏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눈을 마주친 채로 기다렸다.
시녀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말했다.
"…라에르 공작께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공녀님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한테요?"
"예."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시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쥐었지만 바로 펼치지 않았다. 시녀를 돌려보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다음에야 종이를 펼쳤다.
글씨는 단 두 줄이었다.
'황제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면, 내일 새벽 동쪽 정원으로 오십시오.'
서명은 없었다.
나는 종이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밖에서 바람이 또 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황제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눈 안쪽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협박인가, 회유인가, 아니면 진심 어린 경고인가.
원작에서 세아는 버림받고 처형당한다. 황제에게.
그리고 나는 지금, 황제를 돕겠다고 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そんなはずない, 아니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종이를 천천히 접어 손 안에 감쥐었다.
내일 새벽.
동쪽 정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 대답을 찾기도 전에, 문 너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발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이제 알아볼 수 있었다. 무겁고, 느리고, 흔들리지 않는 발소리.
그런데 그 발소리가 내 방 앞에서 멈췄다.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