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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이었다.
그것은 늪지대의 탁한 안개를 꿰뚫는 등대의 불빛도, 저물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잔광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심판하고,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태고의 권능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누가, 나의 신부를 건드리는가.”
목소리는 자하르의 것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그가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거목의 속삭임 같았고, 대지를 울리는 용의 포효 그 자체였다. 루아는 제 등 뒤에서 일어선 그의 존재감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공허의 공포와는 다른, 압도적인 위엄이 질척한 늪지대의 공기를 지배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제국의 그림자, 검은 추적자였다. 그의 완벽한 평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깨졌다. 투구의 깊은 어둠 속, 붉은 안광이 데이터에 없는 변수를 만난 기계처럼 당혹스럽게 깜박였다.
“……이 정보는 보고에 없었다. ‘그릇’이 폭주 외에 제3의 형태로 각성할 가능성은….”
“네놈의 하찮은 보고서 따위에 담길 이름이 아니다.”
자하르는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한 걸음에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는 비틀거리지도, 위태롭지도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왕이 제 왕좌로 돌아가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루아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감쌌다. 그의 넓은 등이, 세상의 모든 위협을 막아주는 견고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제국 놈들이 여왕을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안 봐도 뻔하군. 어리석은 것. 뱀의 혓바닥에 놀아나 제 새끼를 팔아넘기다니.”
그의 황금빛 시선이 경멸을 담아 카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너, 카엘. 나의 수호 기사. 너는 주군을 알아보는 눈마저 먼 것인가. 아니면 고작 저런 가짜 구원의 약속에 네 긍지를 팔아넘긴 것인가.”
“왕자 전하… 그 모습은… 대체….”
카엘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평생을 바쳐 모셔온 주군을 배신했다. 그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그가 알던 나약하고 고통받던 왕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의 전설 속에만 존재하던, 고대 용의 영혼을 현신한 ‘황금의 왕’의 모습이었다. 자신들이 저버린 왕이, 스스로의 힘으로 각성한 것이다.
“가짜 구원이라고?”
추적자가 혼란을 수습하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품속의 수정 병을 다시 꺼내 보였다. 영롱한 황금빛 액체가 어둠 속에서 신비롭게 빛났다.
“눈으로 직접 보시지요. 이것은 ‘태양의 심장’에서 추출한 순수한 생명의 정수. ‘신의 눈물’입니다. 그 어떤 저주와 공허도 소멸시키는 절대적인 정화의 힘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만 있다면, 당신 안의 공허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온전한 용족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루아조차 저 빛나는 액체를 보는 순간, 만약 저것이 정말 자하르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면, 하는 미약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자하르는 코웃음 쳤다.
“정화? 웃기는 소리.”
그의 황금빛 눈이 수정 병을 꿰뚫어 보았다. 마치 그 본질을 남김없이 해부하는 듯했다.
“저것은 구원이 아니다. 황금으로 만든 감옥일 뿐. 생명의 정수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법칙 아래 종속시키는 오만한 지배의 힘이다. 저것을 마시는 순간, 내 안의 공허는 사라지겠지. 하지만 내 영혼 또한 제국의 황제를 위한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멈추고, 그의 영생을 위한 부품이 되어버리겠지. 그것이 네놈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체인가?”
루아는 숨을 멈췄다. 과거의 자신이 홀로그램으로 남겼던 경고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력을 흡수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영생을 만들어내는 끔찍한 주술 장치.’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기만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추적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명백한 동요가 실렸다. 그의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네놈의 얄팍한 생각을 읽는 데 그리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하르는 루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분노와 경멸이 아닌 다른 감정이 스쳤다. 그것은 깊은 신뢰와, 애틋함, 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빛이었다.
“미안하다, 루아. 너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했구나.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인간’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진짜 이름을, 너무나도 다정하게 불렀다.
***
상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검은 추적자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임무는 ‘열쇠’와 ‘그릇’의 온전한 회수였다. 하지만 그릇이 예상 밖의 각성을 이루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기만까지 간파했다. 이 상태에서 억지로 ‘신의 눈물’을 주입하려다가는 그릇 자체가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카엘과 용족 전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배신자가 되었지만, 각성한 주군에게 다시 칼을 겨눌 수는 없었다. 그들의 신념이, 충성심이, 그리고 존재 이유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카엘.”
추적자가 나직이 불렀다.
“이것은 계약 조건 위반입니다. 당신들은 ‘그릇’을 온전히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지금 당장 저항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제국과의 약속은 파기되고 용족은 제국의 적이 될 겁니다.”
“닥쳐라.”
카엘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건 왕자 전하시다. 저 제국의 개가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결심이 섰다. 그는 검을 고쳐 쥐고, 추적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용족 전사들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비록 배신의 오명을 썼지만, 그들의 칼끝이 마지막으로 향해야 할 곳은 명확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추적자는 짧게 탄식했다. 그는 더 이상 협상을 할 생각이 없는 듯, 수정 병을 품속에 넣었다. 대신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명령을 변경한다. 그릇의 생사는 불문한다. 열쇠만 회수하고, 현장의 모든 저항 세력을 제거하라.”
그의 말이 끝나자, 늪지대의 안개 속에서 스스슥,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떠올랐다. 추적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의 그림자 속에, 제국의 암살자들이 숨어 있었다.
순식간에 늪지대는 전쟁터로 변했다.
카엘과 용족 전사들이 포효하며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과 신음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다.
“루아.”
혼란의 중심에서, 자하르는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추적자는 다른 싸움에는 관심 없다는 듯, 오직 자하르와 루아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저자를 막겠다. 너는… 도망쳐라.”
“싫어!”
루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그의 등 뒤에서 한 걸음 나섰다.
“이제 두 번 다시 당신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홀로그램이 말했어. 당신을 구할 방법이, 아니, 우리가 함께 이길 방법이 있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이 열쇠와, 당신의 공허를 공명시키는 거야. 태양의 심장을 파괴하고, 당신의 영혼을 되찾는 방법!”
“위험하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나조차도 내 안의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공허와 용의 힘, 그리고 내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열쇠의 힘까지 더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상관없어!”
루아의 갈색 눈동자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당신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느니, 차라리 당신과 함께 위험에 뛰어들겠어. 그게 내 선택이야.”
그녀의 결연한 눈빛에, 자하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나직이 웃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진짜 미소였다.
“너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용보다도 용감하구나.”
그는 루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었다.
“좋다. 도망치는 것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루아, 이것은 단순히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영혼을 밧줄처럼 엮는, 고대의 계약이다. 한번 맺어지면, 죽음조차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시선이 불꽃처럼 뜨거워졌다.
“나의 저주도, 나의 운명도, 너는 함께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손을 잡겠는가?”
***
검은 추적자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검은 단순한 강철이 아니었다.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는, 살아있는 어둠 그 자체였다. 카엘의 비명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루아의 세계에는 오직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자하르의 손과,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만이 존재했다.
이것이 사명이라면.
이것이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로부터 이어진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가 차올랐다. 사냥꾼 루아로서도, 황녀 루실리아로서도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내리는 첫 번째 선택이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쥔 손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꺼이.”
그녀의 대답이 늪지대의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세계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눈을 멀게 할 만큼 찬란한 백색의 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제국의 가짜 태양이 내뿜는 오만한 황금빛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의 어둠도 아니었다.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순수한 창조의 빛이었다.
빛은 자하르의 황금빛 눈동자와 루아의 결연한 갈색 눈동자를 동시에 집어삼켰고, 그들의 발밑에서부터 고대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이 핏빛으로 타오르며 늪지대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괴이자 재탄생의 서곡이었고,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묶이며 울부짖는 새로운 계약의 포효였다.
추적자의 검은 빛의 장막 바로 앞에서 멈칫했고, 싸우던 모두가 경악하며 빛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서, 루아는 자신의 몸 안 깊은 곳,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