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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제29화: 거짓된 구원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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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고막을 찢는 금속성 파열음이 어둠을 갈랐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죽음을 예고하는 사신의 첫인사였고, 모든 희망의 끈을 끊어내는 단두대의 칼날 소리였다. 제국의 추격자, ‘검은 추적자’가 마침내 검을 뽑았다. 하수도의 희미한 불빛이 번뜩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영하던 검신이 서늘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전하.”

그의 목소리는 흐르는 시궁창 물소리에도 묻히지 않고, 루아의 귓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열쇠를 넘기시고, 제국의 마지막 황족으로서의 존엄을 지키십시오.”

존엄.
썩은 물과 오물이 뒤엉켜 폐부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 그 단어는 지독한 농담처럼 들렸다. 루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제 등 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자하르를 향해 반 발짝 물러서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피 묻은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홀로그램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과거의 ‘나’가 남긴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앙의 씨앗… 파괴할 유일한 방법… 공허의 그릇….’

“제가 정말 그 황녀라면,”

루아가 내뱉은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했다. 공포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 제국을 재앙으로 몰아넣으려는 당신들에게, 순순히 협조할 이유는 없겠군요.”

“재앙이라….”

추적자의 투구 너머에서 희미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하께서는 여전히, 자신이 벌인 일의 무게를 모르시는군요. 좋습니다. 힘으로라도 되찾아갈 수밖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추적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동체시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거리를 좁혀온 것이다. 루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휙! 바로 방금 전까지 그녀의 목이 있던 자리를, 서슬 퍼런 검날이 소름 끼치는 궤적을 그리며 지나갔다. 베어 나간 머리카락 몇 올이 허공에 흩날렸다.

첫 공격을 피한 것은 순전히 사냥꾼으로서의 야생적인 감각 덕분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추적자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검의 방향을 틀어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땅이 울렸다. 아니, 공기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루아의 품에 안겨 있던 자하르의 몸에서, 검은 오라가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그것은 지난번처럼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파괴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주인을 위협하는 존재를 향한, 맹수의 본능적인 경고와도 같은 순수한 척력이었다.

“!”

추적자의 찌르기가 자하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추적자의 몸이 뒤로 살짝 밀려났다. 그의 투구 아래, 붉은 안광이 경이와 탐욕이 뒤섞인 빛으로 번뜩였다.

“이것이… ‘그릇’의 힘인가.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정도의 방어 기제를 펼치다니. 실로 놀랍군.”

그는 위협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귀한 실험체를 관찰하는 학자처럼, 눈앞의 현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빈틈. 루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체중을 실어, 발밑의 더러운 하수를 추적자의 얼굴을 향해 걷어찼다.

첨벙!
역겨운 오물이 그의 투구 정면을 강타했다.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던 추적자가 처음으로 움찔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그 틈을 타 루아는 자하르를 다시 둘러업고, 어둠이 더 깊게 깔린 하수도 터널의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발버둥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처럼 차가웠다.

***

여정은 지옥도를 그리는 질주였다.
하수도는 거대한 미로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자신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유령처럼 따라붙는 추적자의 발소리가 뒤섞여 방향감각을 마비시켰다. 루아는 몇 번이고 막다른 길에 부딪혔고, 미끄러져 시궁창에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온몸은 젖은 생쥐 꼴이었고, 상처에서는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지도를… 길을 찾아야 해.’

과거의 자신이 남긴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너의 피와, 공허의 그릇이 내뿜는 미세한 마력의 파동을 공명시켜라. 그러면 열쇠가 고대의 지도를 보여줄 것이다.’

어떻게? 달리는 와중에 어떻게 그런 복잡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녀의 등 뒤에 업힌 자하르의 몸에서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루아….”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 순간, 루아의 뇌리에 섬광처럼 한 가지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공명. 그것은 복잡한 마법 공식이 아니었다. 가장 원초적인 연결.

“자하르, 정신 차려. 아니, 차리지 마. 그냥… 나를 느껴줘.”

그녀는 달리면서, 피가 흐르는 옆구리에 펜던트를 강하게 문질렀다. 그리고 자하르를 업은 팔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이 자신의 등과 더욱 밀착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고동과 그의 심장 고동을 하나로 맞추려 애썼다.

“부탁이야… 길을 보여줘.”

그녀의 간절한 속삭임에 응답하듯, 펜던트가 다시 한번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빛은 실처럼 가늘게 뻗어 나와, 그녀의 눈앞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점들과, 그것들을 잇는 희미한 선들. 고대의 지도였다.

지도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복잡해서 한눈에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 유독 강렬하게 빛나는 지점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현재 그녀가 있는 위치에서부터 붉은 선 하나가 길을 안내하듯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저곳이야… 태양의 심장이 숨겨진 곳!’

붉은 선은 하수도의 복잡한 경로를 뚫고, 지상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길은 알았다. 남은 것은 저 유령 같은 추적자를 따돌리고, 저곳까지 도달하는 것뿐이었다.

루아는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망설임 없이 물살이 더 거센 갈림길로 뛰어들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따라오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이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희망은, 터널의 끝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출구였다. 지도가 가리키는 경로의 끝, 지상으로 나가는 배수구였다.

***

쾅!
루아는 녹슨 철문을 온몸으로 들이받아 열었다. 비릿한 물이끼와 곰팡이 냄새 대신, 상쾌하지만 어딘가 눅눅한 숲의 내음이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그녀는 마침내 지옥 같은 하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밖은 이미 해가 저물어 어스름이 깔린 늪지대였다. 도시의 불빛은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일 뿐, 사방은 기괴한 모양의 나무들과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발밑은 질척거렸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 모를 생물의 울음소리가 음산함을 더했다.

“하아… 하아….”

루아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자하르를 조심스럽게 옆에 눕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추격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일단은, 따돌린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녀는 펜던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푸른빛의 지도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목적지는 이 늪지대를 가로질러, 안개 너머에 있는 거대한 산맥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용의 무덤’이라 불리는 고대의 금역이었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재앙의 씨앗을, 아무도 찾지 못할 용들의 안식처에 숨겨둔 것이다.

그녀는 결의를 다지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가 첫걸음을 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루아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단도를 꺼내 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검은 추적자가 아니었다. 훨씬 거대하고, 위압적인 실루엣이었다.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그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본 순간, 루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카엘…?”

용족의 수호 기사, 카엘이었다. 그의 은빛 갑옷은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냉소적이던 그의 얼굴은 지독한 피로와 깊은 고뇌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 몇 명의 다른 용족 전사들이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전투를 치른 후였다.

“아가씨.”

카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낮고 거칠었다.

“당신을 찾느라 애 좀 먹었군.”

“어떻게… 여길….”

“발레리우스 님의 추적 마법이다. 그리고… 당신이 남긴 흔적이 너무 요란했거든. 도시 하나를 거의 잿더미로 만들 뻔했다고 들었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의 시선은 루아를 지나쳐 그녀의 곁에 쓰러져 있는 자하르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왕자 전하께서는….”

“괜찮아요. 그냥… 잠들어 있을 뿐이에요.”

루아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카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아주 중요한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족의 기사 나리.”

그들 모두의 등 뒤, 루아가 방금 빠져나온 하수도 출구 쪽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칠흑 같은 망토를 두른 검은 추적자가, 마치 연극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어둠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갑옷에는 하수도의 오물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그는 쫓아온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저 그들을 따라왔을 뿐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루아는 카엘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배신감과 혼란이 떠올랐다. 카엘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래가 있었을 뿐입니다, 전하.”

추적자는 루아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용족의 여왕께서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공허의 그릇’이 되어 세상을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셨지요. 아들을 원래대로 되돌려준다는 조건 하에, ‘열쇠’를 넘기기로.”

“거짓말….”

“그리고 저는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추적자는 품속에서 수정으로 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병 안에서는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황금빛 액체가 스스로 빛을 발하며 고동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태양의 심장’의 원액, ‘신의 눈물’입니다. 이것을 그릇에게 주입하면, 공허의 힘은 정화되고 그의 영혼은 완벽하게 복원될 겁니다. 물론, 열쇠와 그릇의 힘을 파괴적으로 공명시키는 당신의 무모한 계획과는 달리, 부작용도 전혀 없지요.”

루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자하르를 구할 수 있는, 완벽하고 안전한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던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구원이.

“그 대가로,”

추적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얼음처럼 차갑게 루아를 꿰뚫었다.

“당신과 당신이 품은 그 위험한 ‘열쇠’는 제국이 회수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모두를 위한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논리적이었다. 자하르는 구원받고, 세상은 안전해진다. 희생되는 것은 오직 자신 하나뿐. 루아는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

“카엘… 이게 사실인가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엘은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닥을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인간. 이것이… 왕자 전하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절망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가장 믿었던 아군에게 완벽하게 배신당했다.
하지만 추적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펜던트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쓰러져 있던 자하르의 눈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의 눈은 공허의 검은색도, 원래의 푸른색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현자의 지혜와 용의 분노가 뒤섞인 깊고 장엄한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엄과 분노가 서린 왕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누가, 나의 신부를 건드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