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피소드는 오디오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황녀?
내가?
그 단어는 루아의 뇌에 도달하기도 전에, 등 뒤에 짊어진 자하르의 무게가 천 근의 쇳덩이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썩은 물웅덩이와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뒷골목. 방금 전까지 피와 비명이 낭자했던 이곳의 악취가, 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터무니없는 칭호와 기괴하게 뒤섞였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쇳가루가 섞인 것처럼 거칠었다. 공포로 바싹 마른 입안에서 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저는 루아입니다. 잿빛 숲의 사냥꾼일 뿐입니다."
"그 이름도, 그 신분도, 모두 당신이 직접 선택한 위장이겠지요."
칠흑 같은 망토를 두른 사내는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검을 쥔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라기보다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부품을 회수하러 온 기계에 가까웠다.
"제국의 기록보관소는 전하께서 남기신 거짓 흔적들을 모두 소거했습니다. 이제 세상에 ‘루실리아 드 아르젠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황실의 보물을 훔쳐 달아난 대역죄인 ‘아르테미스’만이 있을 뿐. 그러니 소란 피우지 마시고 ‘열쇠’를 넘겨주시는 것이, 전하의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키는 길이 될 겁니다."
그의 말은 얼음송곳처럼 차가웠지만, 그 내용은 루아의 머릿속을 헤집는 거대한 폭풍이었다. 내가 직접 선택한 위장? 거짓 흔적? 마지막 남은 명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기억의 안개가 더 짙어졌다. 그녀의 정수리를 꿰뚫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다시금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끝없이 이어진 백색의 회랑.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오색찬란한 빛.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고동치던, 살아있는 태양의 조각. 그 기억 속 ‘나’는 지금의 루아가 아니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차갑고 단단한 결의에 찬 눈빛을 한 낯선 여자였다.
"열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남자는 투구의 그림자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루아의 목에 걸린, 이제는 희미한 빛조차 내지 못하는 초승달 펜던트였다.
"그리고 열쇠를 작동시킬 ‘그릇’도 함께 있군요. 일이 아주 편하게 됐습니다."
그의 시선이 루아의 품에 안긴 자하르에게로 옮겨갔다. 그 순간, 루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하르가 공허의 그릇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이것은 우연한 추격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게 이 펜던트라면… 가져가."
루아는 결심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풀어,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체 모를 과거가 아니었다. 오직 자하르를 지키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걸 줄 테니, 우릴 그냥 보내줘요."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작게 기울였을 뿐이다.
"전하답지 않은 어리석은 판단이십니다. 열쇠가 당신의 손을 떠나는 순간, 당신과 그 ‘그릇’은 제국에 아무런 가치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당신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 같으십니까?"
섬뜩한 협박이었다. 열쇠를 줘도 죽고, 주지 않아도 죽는다. 선택지는 없었다.
루아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흔들리는 찰나였다. 그녀의 발치에 채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까 현상금 사냥꾼이 떨어뜨리고 간, 녹슨 쇠갈고리였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잿빛 숲에서 굶주린 늑대와 대치하던, 사냥꾼의 눈으로.
그녀는 펜던트를 쥔 손을 앞으로 내미는 척하며, 다른 손으로 재빨리 갈고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남자가 아닌 그의 등 뒤, 낡은 건물의 벽을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카랑!
쇠사슬이 풀리며 날아간 갈고리는,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낡은 나무 간판을 정확히 가격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인 남자 몸통만 한 간판이 그대로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처음으로 남자의 입에서 짧은 경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몸을 날려 간판을 피했지만, 그 찰나의 빈틈은 루아에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자하르를 고쳐 업고, 반대편 골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역시, 보통 분은 아니시군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미세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추격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
잿빛 교차로의 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선술집의 화재 소식을 들은 경비병들의 고함 소리, 양동이로 물을 나르는 상인들의 외침,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틈타 물건을 훔치려는 좀도둑들의 비명이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루아는 그 혼돈의 파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비켜요! 비켜!"
그녀는 사람들을 헤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에 업힌 자하르의 무게가 뼈를 으스러뜨릴 듯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제국의 망령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쫓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지도,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루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인파의 흐름을 물처럼 가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폐가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다리가 풀렸다. 이대로는 잡히는 것이 시간문제였다.
그때, 그녀의 눈에 한 줄기 빛처럼 들어온 것이 있었다. 시장의 가장 구석,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 처리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철문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옆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작은 통로가 뚫려 있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악취를 참아내며, 좁은 통로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
어둠과 악취.
그것이 그녀가 몸을 숨긴 지하 세계의 전부였다. 발밑에서는 시커먼 하수가 강물처럼 흘렀고, 천장에서는 이름 모를 점액질이 뚝뚝 떨어졌다. 공기 중에는 부패의 냄새가 너무나도 짙어, 숨을 쉴 때마다 혀끝이 마비되는 듯했다.
루아는 좁고 축축한 벽에 등을 기댄 채, 자하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숨소리는 여전히 희미했지만, 아까의 폭주 이후 오히려 안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옷소매로 그의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주었다.
"미안해…. 또 나 때문에…."
자책감이 독처럼 퍼져나갔다. 자신이 정말 그 ‘황녀’라는 존재라면, 이 모든 불행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자하르는 그저 그녀의 운명에 휩쓸린 것뿐이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초승달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끈질기게 자신을 쫓는 이 모든 재앙의 근원. ‘열쇠’라고 불리는 물건.
어둠 속에서 펜던트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은 조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까 자하르가 폭주했을 때, 이 펜던트는 그의 공허를 잠재우는 백색의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눈물에 반응해서.
혹시….
루아는 아까 현상금 사냥꾼에게 맞아 찢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더듬었다. 쓰라린 통증과 함께, 손끝에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그 피 묻은 손가락으로 펜던트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
펜던트가 마치 갈증을 느끼던 생물처럼 그녀의 피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내, 펜던트의 중심에서부터 한 줄기 빛이 피어올랐다. 어둠을 몰아내는 백색의 빛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품은 정보의 집합체처럼,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빛이었다.
빛은 허공에 맺히며, 작은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그것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사람의 얼굴이었다.
루아는 숨을 삼켰다. 그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면서도, 동시에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다. 지금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머리는 짧았으며, 눈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웠다. 하지만 이목구비는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사냥꾼 루아가 아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루실리아’였다.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여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루아 자신의 것보다 한 톤 낮고, 감정의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음성이었다.
『이 기록이 재생되었다는 것은, 나의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다는 의미겠지. 제국의 추격자들에게 쫓기고 있거나, 혹은 ‘열쇠’의 진정한 용도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거나.』
과거의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야. 내가… 정말 당신이야?"
루아의 질문에, 빛의 형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기록된 메시지일 뿐이었다.
『기억을 지운 것은 나 자신이다. 루실리아 드 아르젠토라는 이름과 그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는 너무 약했기에. 아니,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졌기에. 이 모든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사명’만을 바라볼 새로운 내가 필요했다.』
사명? 비극을 끝내? 루아는 혼란스러웠다.
『잘 들어라, 과거를 잃어버린 나. 너는 지금 거대한 기만 속에 서 있다. 제국이 말하는 ‘태양의 심장’은 신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에 만들어진 재앙의 씨앗이며,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력을 흡수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영생을 만들어내는 끔찍한 주술 장치다. 황제는… 나의 아버지는, 그 힘으로 신이 되려 하고 있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제국의 보물이 아니라, 세상을 파괴할 병기라고?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태양의 심장’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파괴할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그에 필적하는 ‘공허’의 힘을 부딪치는 것뿐.』
홀로그램의 시선이, 루아의 등 뒤에 누워있는 자하르를 향하는 듯했다.
『하지만 공허는 통제할 수 없는 힘. 섣불리 사용했다가는 심장과 함께 세상 전체가 무로 돌아갈 수 있지. 그래서 ‘열쇠’가 필요하다. 이 펜던트는 공허의 힘을 증폭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안전하게 ‘태양의 심장’에 유도하고 소멸시키는 조율 장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릇의 영혼을 복원하는, 단 한 번의 기적을 일으키지.』
루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자하르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처음부터 자신의 손안에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없다. 제국의 개들이 이미 너의 냄새를 맡았을 터. 그들이 열쇠를 손에 넣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다. 너는 반드시 그들보다 먼저, ‘태양의 심장’이 숨겨진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공허의 그릇을 이용해 그것을 파괴해야만 해. 그것이 너,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데! 그게 어디 있는데!"
루아가 허공의 형상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
『장소는… 오직 열쇠를 쥔 너만이 찾을 수 있다. 너의 피와, 공허의 그릇이 내뿜는 미세한 마력의 파동을 공명시켜라. 그러면 열쇠가 고대의 지도를 보여줄 것이다. 단, 명심해. 절대로… 절대로 제국의 감시자, ‘검은 추적자’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그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홀로그램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 하수구 철창 덮개 너머에서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미있는 독백이군요, 전하."
루아의 심장이 그대로 멈췄다. 칠흑 같은 망토를 두른 제국의 기사가, 어느새 그들의 바로 위에 서서,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하수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투구 아래, 붉은빛을 띤 마력의 안광이 번뜩였다.
"친절한 설명 덕분에, 제 임무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남자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열쇠의 회수,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지독한 살의를 머금었다.
"황명을 거역한 마지막 황족의 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