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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제27화: 검은 태양의 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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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속에서 비명이 사라졌다.

존재했던 한 인간의 마지막 단말마는 소리가 되어 터져 나오기도 전에, 그의 육신을 이루던 모든 원자와 함께 무(無)의 나락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은 것은 한 줌의 검은 먼지가 바람에 흩어지는 잔상과, 그 자리에 대신 들어찬 혹한의 냉기뿐이었다. 세상의 일부가 도려내진 듯한 이질적인 공백.

"이… 이게… 무슨…."

우두머리 흉터 남자의 턱이 경련하듯 떨렸다. 눈앞의 광경을 뇌가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마법? 저주? 그가 아는 그 어떤 초자연현상으로도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부하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공포의 진원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관절, 마모된 태엽으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남은 현상금 사냥꾼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검은 눈동자.
아니, 저것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빛을 반사하는 각막도, 감정을 담는 홍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을 오려 붙인 듯한, 순수한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두 개의 작은 블랙홀. 그 시선이 그들을 향하는 순간, 영혼의 밑바닥부터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자하르…."

벽에 처박혔던 고통도 잊은 채, 루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갈라진 목소리는 거의 소리가 되지 못했다. 저것은 그녀가 알던 자하르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저 텅 빈 껍데기는 분명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었다. 그의 안에 남은 마지막 본능, 그녀를 향한 희미한 잔향이 이 끔찍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저… 저 자식부터 처리해! 마법사다! 주문을 외우기 전에 목을 날려버려!"

공포에 질린 우두머리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탐욕이 공포를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저 괴물을 쓰러뜨리고 로브를 뒤지면, 제국이 내건 현상금보다 더 엄청난 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미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죽어라, 괴물아!"

남은 부하 하나가 기합을 지르며 자하르에게 달려들었다. 강철 장검이 차가운 골목의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검은, 목표에 닿지 못했다. 자하르의 검은 눈이 칼날을 향하는 순간, 쨍!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잘 벼려진 검신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뭐…?"

사냥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순식간에 부식되어 삭아 내렸다. 시퍼런 강철이 검붉은 녹으로, 이내 검은 흙가루가 되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간의 흐름을 억만 배로 가속한 듯한 섬뜩한 붕괴. 남자는 무기 없는 맨손으로 허공을 휘저은 꼴이 되었다.

그리고 그 텅 빈 손은, 자하르의 목에 닿기 직전 멈췄다. 자하르가 아주 느리게 손을 들어, 남자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크… 크아아악!"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하르의 손이 닿은 부위부터 남자의 팔이 급속도로 ‘말라붙기’ 시작했다. 수분이 증발하고, 살이 쪼그라들고, 뼈가 검게 변색되며 바스러졌다. 생명력 그 자체를 빨아들이는 듯한 끔찍한 흡수. 남자는 팔을 빼내려 발버둥 쳤지만, 자하르의 손은 세상 그 어떤 족쇄보다도 단단하게 그의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루아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두면 저 남자도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자하르는 더 이상 살인과 소멸을 구분하지 못하는 재앙 덩어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녀는 옆구리를 에는 고통을 무릅쓰고, 비틀거리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

"이 미친 계집이!"

루아가 달려드는 것을 본 우두머리 흉터 남자는, 목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는 어차피 가망이 없어 보이는 부하를 버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여자를 먼저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거대한 양손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루아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피할 수 없었다. 루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바로 앞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쿵! 마치 강철 벽이라도 막아선 듯한 소리.

루아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하르의 등이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팔을 빨아들이던 현상금 사냥꾼을 내팽개치고, 루아의 앞을 막아서 있었다. 흉터 남자가 전력을 다해 내리친 도끼날은, 그의 맨 어깨에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마치 바위에 박힌 나뭇가지처럼, 그의 육신은 무기보다 더 단단한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내 것…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심연에서 울려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건드리지… 마라….」

그 말이 끝나자, 도끼날이 닿은 그의 어깨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살아있는 뱀처럼 도끼날을 휘감고, 순식간에 도끼 자루를 쥔 흉터 남자의 팔까지 기어 올라갔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떨어져!"

남자는 질겁하며 도끼를 놓으려 했지만, 검은 안개는 마치 접착제처럼 그의 손을 도끼에 붙들어맸다. 그는 자신의 팔이 아까의 부하처럼 말라붙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자하르! 그만! 제발!"

루아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녀의 온몸으로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놓지 않았다.

"나야, 루아. 기억 안 나? 제발… 원래의 너로 돌아와 줘."

그녀는 울부짖으며,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를 꺼내 그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펜던트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공허의 마력에 닿은 펜던트에서, 눈이 시리도록 순수한 백색의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자하르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안개를 정화하듯 밀어냈고, 그의 몸을 옥죄던 흉터 남자는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크… 으윽…."

자하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 한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텅 빈 그릇 안에서, 허무의 의지와 그녀를 지키려는 마지막 잔향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루아를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던 그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아까와 같은 절대적인 공허는 아니었다. 혼란과 고통이 뒤섞인, 폭풍우 치는 밤바다 같은 눈이었다.

"…루…아…?"

마치 수만 년 만에 처음 발음하는 단어처럼,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모든 힘을 소진한 그의 거체가, 그대로 루아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

정적이 흘렀다.

루아는 쓰러진 자하르를 끌어안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골목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팔 하나가 미라처럼 변한 채 신음하는 흉터 남자와, 공포에 질려 오물을 지리며 주저앉은 그의 부하. 그들은 더 이상 루아를 위협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그녀의 품에 안긴 남자를, 악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가… 가자! 여긴 틀렸어! 저건 인간이 아니야!"

흉터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의 부하도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좁고 더러운 뒷골목에는 루아와 의식을 잃은 자하르, 단둘만이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위기는 넘겼다고.

하지만 그녀의 안도는 너무 일렀다.

스윽.

그림자가 움직였다. 골목의 입구, 그들이 들어온 길을 막아서듯 새로운 인영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현상금 사냥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완벽하게 기척을 죽인 등장이었다.

그는 칠흑 같은 망토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엿보이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세공된 제국식 은빛 갑옷이었다. 허리춤에는 가늘고 긴 장검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투구의 깊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방금 전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잘 벼려진 칼날 그 자체 같은, 서늘하고 치명적인 기운이었다.

남자는 루아와 자하르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 하나 건드리지 않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역시 소문대로군요."

그림자 속에서,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지독히도 사무적인 어조였다.

"제국의 ‘태양의 심장’을 훔쳐 달아난 도둑, 아르테미스. 그리고… 심장을 품은 ‘그릇’이라."

남자의 시선이 루아를 지나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자하르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는 탐욕이나 분노가 아닌, 가치를 감정하는 감정사의 것과 같은 냉정한 빛이 서려 있었다.

루아는 본능적으로 자하르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남은 힘을 쥐어짜 단도를 고쳐 쥐었다.

"누구… 누구야, 당신."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그녀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저는 그저, 제국의 물건을 회수하러 온 사람일 뿐이니. 얌전히 ‘그릇’을 넘겨주시지요. 아르테미스 님. 아니…."

남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는, 루아의 세계를 다시 한번 뒤흔드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본명으로 불러드려야 예의일까요. 제국의 마지막 황녀, 루실리아 드 아르젠토 전하."

황녀?
내가?
루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그 순간, 남자의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 위로 올라갔다.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전하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으니, 어서 ‘열쇠’를 넘기시지요."

열쇠? 그는 태양의 심장도, 그릇도 아닌, ‘열쇠’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의 시선은, 자하르가 아닌, 루아의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