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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계약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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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아린, 27세, 평범한 계약직 비서다. 아니,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금은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에 서 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손바닥까지 전달될 정도다. 이곳은 오준혁, 대한민국에서 가장 냉혹한 재벌 CEO라 불리는 남자의 집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와 6개월간의 동거 계약을 맺으러 온 참이다.

사무실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단지 서류를 전달하러 간 비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그 깊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훑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는 말없이 서류를 넘기며 단 한마디를 던졌다.

"강아린 씨, 내 제안을 들어보겠나?"

그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는,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내 인생을 뒤바꿀 계약을 제안했다. 6개월간 그의 비서 겸 동거인으로 생활하며, 그의 모든 일정을 관리하고, 필요할 때마다 ‘특별한 역할’을 맡는 것. 대가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거대한 금액과, 계약 종료 후 평생을 보장해줄 커리어였다.

"특별한 역할이라니, 그게 대체 뭔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필요할 때 알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네가 거절할 권리는 언제나 있으니까."

그 말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렸다. 거절할 권리가 있다면서, 왜 그의 눈빛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걸까?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읽고 서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빚에 찌든 가정, 병원비로 매달 빠져나가는 돈. 이 계약은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펜트하우스에 서 있는 순간, 내가 과연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오준혁은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 검은 수트가 그의 날렵한 체형을 완벽히 감싸고 있었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마는 마치 조각처럼 완벽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왔군. 짐은 다 가져왔나?"

"네, 방금 도착했어요. 짐은… 많지 않아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거대한 거실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네 방이다. 필요한 건 이미 다 준비해뒀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

그의 말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태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내가 살던 원룸보다 훨씬 넓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야. 나는 단지 계약에 묶인 사람일 뿐이다.

짐을 정리하며 계속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준혁이라는 남자. 그는 대체 왜 나를 선택한 걸까? 수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나 같은 평범한 계약직 비서를?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를 탐하는 듯한 그 시선.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강아린, 정신 차려. 이건 그냥 계약이야. 감정 따위 개입시키지 마.’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그리고 이 집 어딘가에 있을 오준혁의 존재가 계속 신경 쓰였다. 그러다 문득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문틈 사이로 보였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 안 오나 보군. 괜찮아, 첫날이니까. 내일부터는 익숙해질 거야."

"아… 네, 괜찮아요. 그냥… 좀 낯설어서요."

그는 대답 대신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 낮고 깊은 울림. 나는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이건 계약일 뿐인데, 왜 그의 한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의 일정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새벽부터 회의 준비로 바빴고, 나는 그의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강아린 씨, 오늘 밤 일정 비워둬. 중요한 자리가 있으니 동행해야 할 거야."

"동행이요? 어떤 자리인데요?"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해내야 할 자리야. 준비 잘해둬."

그 말에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중요한 자리라니, 대체 뭘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그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필요로 하는 역할’이라니, 그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그의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앞으로 6개월 동안 이 긴장감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드레스를 입고 그의 옆에 섰다. 거대한 연회장,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준혁은 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낮게 속삭였다.

"긴장하지 마. 오늘은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체온,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차가운 가면 뒤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욕망이었을까? 아니, 내가 착각한 걸까?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그의 손길과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계약일 뿐이다. 감정은 없다. 나는 계속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계약, 단순한 비즈니스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연회가 끝난 후,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우리 사이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잘했어, 강아린.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돼."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나를 멈추게 했다.

"잠깐. 오늘 밤, 좀 더 얘기하고 싶군. 들어오지 않겠나?"

그 말에 내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강렬했다. 나는 문 앞에서 망설였다. 이 문을 열면, 정말로 계약의 경계를 넘게 되는 걸까? 아니, 이미 나는 그 경계를 넘어버린 걸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