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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었다. 연회장에서의 뜨거운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며, 내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준혁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던 그 감촉,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던 순간. 그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니, 꿈이어야 했다. 이건 계약일 뿐이니까. 나는 계속 스스로를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잠깐. 오늘 밤, 좀 더 얘기하고 싶군. 들어오지 않겠나?"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망설였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문을 열면, 정말로 계약의 경계를 넘는 걸까? 아니, 이미 나는 그의 눈빛에, 그의 손길에 흔들리고 있는 걸까? 마음 한구석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울렸다. ‘강아린, 이건 위험해. 감정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냥 들어가. 단지 대화일 뿐이야. 무슨 일이 있겠어?’ 나는 결국 문을 열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은 거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낮은 조명 아래, 검은 가죽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은 전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도시의 불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오준혁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다. 수트 상의를 벗은 그는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더 위험해 보였다. 단정함 뒤에 숨겨진 날것의 매력. 나는 숨을 삼키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긴장 풀라고."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물이면 충분해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짧은 전율이 온몸을 스쳤다. 왜 이렇게 작은 접촉에도 심장이 흔들리는 걸까? 나는 물잔을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 연회에서 잘했어. 사람들이 널 많이 주목하더군."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인데요. 별로 한 것도 없어요."
"아니, 네 존재 자체가 충분했어.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말해주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차가운 가면 뒤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충분하다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 강렬한 것을 느꼈다. 욕망일까? 아니, 그 이상의 것일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내가 더 강해져.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오늘 네가 내 옆에 서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다시 한 번 확신했어."
그 말에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건 계약일 뿐인데, 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이렇게 흔드는 걸까? 나는 손에 쥔 물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그냥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 말,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나는 숨을 죽였다. 그의 손이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부담스럽다고? 그럼 이렇게 말하지. 넌 내 옆에 있어야 할 사람처럼 느껴져. 계약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건 위험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내 턱을 스치며 내려갈 때, 나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이만 가볼게요. 피곤해서요."
나는 겨우 그 말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아린, 도망치지 마. 나도, 너도, 이미 이 경계를 넘고 싶어 하는 거 알잖아."
그 말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조여왔다. 도망치지 마라니. 경계를 넘고 싶다니. 그 말은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은 따뜻하고 강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계약이에요. 감정은 없어야 한다고요. 당신도 그걸 알잖아요."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으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는 위스키 잔을 다시 손에 들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계약이야. 감정은 없어야지. 하지만 강아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통제되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걸, 오늘 알았어."
그의 말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 깊은 눈동자. 나는 왜 이렇게 그에게 끌리는 걸까? 이건 계약일 뿐인데, 왜 그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나는 결국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지만,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손길, 그의 눈빛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강아린, 정신 차려. 이건 계약이야. 6개월만 버티면 돼. 감정 따위, 절대 개입시키지 마.’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방에서 나왔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이 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체취, 그의 목소리, 그의 눈빛. 나는 계속 그를 떠올리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창문 너머로 해가 떠오를 때,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는 그와 거리를 두자.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 하지만 그 결심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나는 알았다. 오준혁이라는 남자는, 내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의 일정을 확인하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냉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다. 마치 어젯밤의 대화는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훑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다시 나를 불렀다.
"강아린, 오늘 밤 또 중요한 자리가 있어. 준비해."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 연회장일까? 아니, 이번엔 뭔가 다른 걸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번엔 또 어떤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과연 그의 옆에서, 그의 손길 속에서, 또다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계약, 정말로 단순한 비즈니스로 끝날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오늘 밤이 또 다른 경계를 넘는 밤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