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피소드는 오디오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2089년, 뉴서울의 밤은 끝없이 빛난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 하늘을 가리는 초고층 빌딩들 사이로 드론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닌다. 공기는 늘 습하고, 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그 거리 한복판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손끝은 땀으로 축축하다. 뒤를 돌아볼 용기는 없다. 리셋의 추격자들이 나를 쫓고 있다는 걸 직감으로 안다.
이름은 이나.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그렇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내 이름인지, 아니면 리셋이 심어준 가짜 데이터인지 확신할 수 없다. 리셋은 기억을 지우고 새로 쓰는 기업이다. 사람들의 과거를 삭제하고, 원하는 삶을 ‘재구성’해준다. 나는 그곳에서 탈출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확신.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여기서 뭐해, 멍청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귀에 꽂힌 이어피스에서 들려오는 낮고 거친 목소리. 유령이다. 정체 모를 해커. 나를 돕겠다고 나타난 자.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 목소리가 내 유일한 동아줄이다.
“숨으려고… 골목으로 들어왔어. 근데 여기가 막다른 길이야.”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골목 끝, 녹슨 철제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열릴 기미는 없었다. 뒤에서는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론의 기계음도 섞여 들렸다. 저 소리는 리셋의 감시 드론이다. 나를 스캔하고, 위치를 추적하는 기계.
“젠장, 넌 왜 항상 이렇게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거야? 왼쪽 벽, 쓰레기통 뒤에 비상구 있어. 빨리 움직여.”
유령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이상하게도 차분한 울림이 있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오를 듯 말 듯 아른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지듯 몸을 숙이고, 벽에 붙은 좁은 비상구를 찾아냈다. 녹슨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마워, 유령.”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문을 통과했다. 어두운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냄새나는 지하 통로였다. 하지만 추격자들의 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적어도 지금은 안전하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해. 지금은 움직여. 그 통로 끝에 폐쇄된 지하철역이 있어. 거기서 나랑 접선할 거야.”
유령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울리는 지하 통로.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자, 벽에 낙서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리셋은 거짓이다.’ ‘기억을 되찾아라.’ 누가 쓴 글씨일까. 나처럼 리셋에서 탈출한 자들일까?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쇄된 역은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플랫폼에는 오래된 광고판이 걸려 있고, 네온사인의 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왔다. 그 순간, 이어피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나, 거기 있지? 나 지금 너한테 가고 있어. 근데 한 가지 말해둘 게 있어.”
유령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눈을 좁히며 물었다.
“뭔데?”
“네 기억, 리셋이 지운 게 전부가 아니야. 네가 잊고 있는 진실… 나와 관련이 있어.”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령이 나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그 목소리,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나는 대답을 찾으려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추격자들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도망쳐!”
유령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폐쇄된 역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머릿속에는 온통 의문만 가득했다. 유령은 누구인가.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리셋이 나에게서 숨긴 진실은 대체 무엇일까.
뉴서울의 밤은 끝없이 깊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답을 찾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