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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의 충격적인 폭로와 한서 오빠의 슬픈 침묵은 나에게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 내 실종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진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이 모든 말이 내 안에 쌓여 있던 불안감을 기어이 폭발시키고 말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지 속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한서 오빠의 약속, ‘혼자 두지 않을게.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말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그 약속 역시 그 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눈을 떴다. 피곤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이 거대한 저택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했다. 그게 나를 어디로 이끌든, 어떤 고통을 주든 상관없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내 방 안을 둘러봤다. 이 호화로운 공간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위로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억압하는 비밀의 성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 반드시 실마리가 있을 터였다.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제와 달랐다. 더 이상 조심스럽지 않았다.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아버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고, 한서 오빠는 차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준서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그토록 격렬한 싸움을 벌인 후, 그는 아마 나를 피하는 것이겠지. 혹은 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린아,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아버지가 따뜻하게 말을 건넸지만, 나는 그 온기마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모든 따뜻함이 어쩌면 거대한 비밀을 감추기 위한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 아버지. 좀… 할 일이 있어서요."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한서 오빠는 나를 힐끗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빛은 어제 내가 본 결심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린아, 오늘 혹시 특별한 계획 있어? 내가 같이 가줄까?"
그의 목소리에는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어쩌면 내가 진실을 찾아 나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요, 오빠. 괜찮아요. 그냥… 집안을 좀 더 둘러볼까 해서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가 나를 막으려 할까 봐 두려웠다. 그가 내 뜻을 존중해 주기를 바랐다.
한서 오빠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곧장 내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어제 준서가 나를 데려갔던 응접실을 향했다. 그곳에서 준서가 쏟아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어요.' '당신이 사라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죠.' 응접실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앤티크 가구들과 오래된 장식품들이 즐비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내게 답을 주지 못했다.
나는 응접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혹시 어머니와 관련된 물건이 있을까 싶어 모든 것을 유심히 살폈다. 낡은 책장, 서랍장, 벽에 걸린 그림들까지. 그러다 문득 벽난로 옆에 놓인 작은 수납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가구들과는 달리 유난히 낡고 오래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누군가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수납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낡은 액자와 함께, 빛바랜 종이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낡은 상자들을 치우고 그 종이뭉치들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래된 편지 묶음이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김태준 비서가 보여줬던 어머니의 필체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편지들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쓰는 듯했지만, 수신인이 명확하지 않았다. 내용은 주로 어머니의 불안과 걱정, 그리고 어떤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밝혀지면, 당신도 나를 버릴 거야. 하지만 나는… 내 아이만은 지키고 싶어. 이 모든 더러운 진실로부터… 하린이만은…."
'하린이만은'이라는 글귀에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나는 다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결국 회사였어. 나는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야. 당신이 나를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그들과 한패가 될 수 없어. 나의 하린이에게… 이런 끔찍한 진실을 물려줄 수는 없어…."
편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들', '회사', '이용당했다'. 나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이 집안의 어떤 음모에 휘말려 있었고, 나를 그 음모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말했던 '불미스러운 일'은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이나 내 실종을 넘어, 이 집안의 경영권 다툼이나 더러운 비밀과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마지막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 편지는 다른 편지들과 달리 봉투 없이 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나를 더욱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그들의 위협은 점점 심해지고, 나는 하린이를 지킬 방법이 없어 보여. 김 비서에게… 부탁했어. 하린이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이 선택이… 하린이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을 알지만… 이것만이 내가 하린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미안하다, 하린아. 엄마는… 정말 미안하다."
나는 손에 들린 편지를 떨어뜨렸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김 비서. 김 비서가 어머니의 죽음과 나의 실종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나를 이 집에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늘 친절했다. 그의 친절함 뒤에 이런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때였다.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태준 비서였다. 그는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어머니의 편지들을 향했다. 그도 분명 그것들을 봤을 것이다.
"하린 아가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 내게는 마치 거대한 심연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동안 내가 믿고 의지했던 그의 친절이 한순간에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는 어머니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비밀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비서님… 이 편지들… 아시죠? 어머니가… 제게 미안하다고 한 이유가… 비서님 때문이었나요?"
김태준 비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고요했지만, 내게는 마치 사냥꾼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아가씨… 그 편지는… 보지 않는 것이 좋으셨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체념, 그리고 어딘가 모를 경고가 섞여 있었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그 편지였다. '김 비서에게… 부탁했어. 하린이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그는 편지를 읽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가…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경악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나와 가족들로부터 숨겨왔던 것이다. 배신감과 함께 거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누군가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머니는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고… 제가 왜 버려져야 했나요? 누가… 누가 어머니를 위협했던 거죠?"
내 질문에 김태준 비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더니,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나를 다시 한번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내가 더 이상 파고들어서는 안 될 금기를 건드린 듯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아가씨… 부디 이 일은… 모르는 척 해 주십시오. 이 집에 대한 진실은… 아가씨가 감당하기 힘드실 겁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니. 그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고, 동시에 어딘가 숨겨진 위협의 실체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호하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비밀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나는 그 혼란스러운 시선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찾던 진실은, 단서가 아니라 또 다른 미궁의 입구였던 것이다. 이 저택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그 그림자 속에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비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태준 비서의 눈빛은 마치 나를 향해 경고하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모든 미로 속에서 과연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진실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