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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비서의 마지막 경고는 차가운 족쇄가 되어 내 발목을 휘감았다. 방으로 돌아왔지만, 호화로운 가구와 부드러운 침대는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는 거대한 감옥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희생, 25년간의 침묵, 그리고 여전히 이 저택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나는 이제 거대한 체스판 위에 올려진, 스스로 움직여야만 하는 외로운 졸이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대로 김 비서의 경고에 따라 입을 다물고, 주어진 부와 안락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까? 어머니는 그걸 원하셨을까? 아니. 그녀가 편지에 남긴 절박함은, 진실이 묻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어머니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그림자의 실체를 밝혀내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설령 그 끝에서 내가 다시 버려진다 해도.
결심이 서자,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내가 가진 패는 너무나도 적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김 비서가 가져가 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그의 모호한 증언과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 나는 혼자서는 이 거대한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내게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약속해.’ 한서 오빠. 그의 다정함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 또한 진실을 덮으려는 자의 위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는 준서나 아버지와는 달랐다. 적어도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슬픔을 공유해주었다. 나는 그의 서재로 향했다. 지금 당장, 그의 진심을 확인해야만 했다.
밤이 깊은 시각, 저택의 복도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으스스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한서 오빠의 서재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책 냄새와 은은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는 커다란 오크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린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잠이 안 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나는 그 너머의 진실을 찾기 위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내 불안한 얼굴이 비쳤다.
“오빠. 저한테 약속했죠. 저를 지켜주겠다고.”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나는 그 온기에 속지 않으려 애썼다.
“당연하지. 무슨 일 있어? 준서가 또 뭐라고 했어?”
“아니요. 준서 오빠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그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오늘… 김 비서님과 이야기했어요. 응접실에서.”
김 비서의 이름이 나오자, 한서 오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평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경계심이 가득한 낯선 눈빛이었다. 그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
“많은 걸요.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제가 왜 사라져야 했는지에 대해서요. 오빠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제발 그가 모른다고, 나를 속이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를 기만했다는 배신감 사이에서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한서 오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서재의 스탠드 조명이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어디까지… 들은 거야?”
그의 목소리는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피해왔던 심판의 날이 드디어 찾아온 사람처럼. 나는 그의 반응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공범자였다. 침묵의 공범자.
“어머니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고, 제 실종은 어머니가 저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거요. 그리고 이 집안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림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요. 오빠, 대체 그 그림자가 뭐예요? 아버지가 말한 ‘불미스러운 일’이 대체 뭐냐고요!”
내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한서 오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했다.
“어떤 진실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 하린아. 한번 열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와 아버지는… 네가 그 상자를 열지 않기를 바랐어.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너의 평범한 행복을… 우리가 대신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건 행복이 아니에요! 그건 거짓이고 기만일 뿐이라고요! 저는 알아야겠어요. 오빠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주세요. 제발….”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애원했다. 그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25년 전… 아버지는 지금처럼 그룹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니었어. 아버지에게는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지. 바로 서영그룹의 윤 회장이었어. 두 그룹은 사사건건 부딪혔고,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서영그룹.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원래 윤 회장 쪽 사람이었어.”
“네? 그게 무슨….”
“정확히는 윤 회장이 가장 아끼던 비서의 딸이었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어. 우리 그룹의 내부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 하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버렸어. 어머니는 결국 윤 회장을 배신하고 아버지의 편에 섰지. 그리고… 네가 태어난 거야.”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내 어머니가 스파이였다니.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윤 회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 그는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아니, 아버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협박과 위협을 가했지. 그게… 어머니가 편지에 썼던 ‘그들’의 정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태어난 직후,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어.”
한서 오빠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서영그룹 윤 회장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어. 그리고 그 사고 현장 근처에서… 우리 그룹 소속 차량이 발견됐지. 물론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윤 회장은 그걸 빌미로 아버지를 압박하기 시작했어. 아들을 죽인 살인자라고, 복수하겠다고. 그때부터였어. 어머니를 향한 위협이 노골적으로 변한 게.”
모든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경영권 다툼,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 진부한 드라마 같았지만, 그것이 바로 내 가족에게 닥쳤던 현실이었다.
“어머니는… 윤 회장이 너를 해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김 비서에게 너를 맡기고, 자신은 모든 걸 안고 가려고 했던 거야. 아버지를 지키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한서 오빠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심장이 조각나는 듯 아팠다. 어머니는 이 모든 진흙탕 속에서 홀로 싸우다 스러져간 것이었다.
“그럼… 지금도 서영그룹이…?”
“아니. 윤 회장은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몇 년 뒤에 죽었어. 서영그룹은 무너졌고.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저 끔찍한 과거로 묻어두려고만 했지. 준서가 너를 그토록 경계하는 건… 네가 나타나면서 이 모든 비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야. 그 녀석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며 살아왔으니까.”
모든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졌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서영그룹은 무너졌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오빠, 고마워요. 말해줘서.”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린아… 이제 다 잊어. 더 이상 파고들지 마. 위험해.”
“아니요. 저는 이제 시작이에요.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겠어요.”
나는 그의 서재를 나와 곧장 저택의 자료실로 향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자료실의 컴퓨터를 켜고, 떨리는 손으로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했다. ‘서영그룹’, ‘윤 회장’, ‘교통사고’, 그리고 ‘25년 전’.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두 그룹의 경쟁에 대한 기사들이었다. 나는 스크롤을 내리며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구석에 있던 아주 작은 단신 기사를 발견했다.
서영그룹 윤 회장 외아들, 음주운전 차량에 희생… 운전자는 현장서 도주.
음주운전? 한서 오빠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관련 기사들을 닥치는 대로 클릭했다. 그러다, 한 기사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숨을 멈췄다. 사고를 수사했던 담당 형사의 이름. 그리고 그 기사 끝에 붙어 있던 작은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그 형사와 함께, 이제는 중년이 된 한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늘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람.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마우스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사진 속 남자는, 바로 김태준 비서였다.
어머니가 가장 믿고 나를 맡겼던 그가, 어떻게 서영그룹 아들의 사고 현장을 수사한 형사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가 내게 숨긴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부탁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끼익, 하고 자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의 준서가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가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결국… 거기까지 알아냈군요.”
그의 목소리는 분노나 경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공허한 속삭임이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말 끝났어.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