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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악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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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끝났어.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거야.”

준서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아와 내 고막을 찢었다. 죽음. 그 단어가 가진 섬뜩한 무게가 자료실의 차가운 공기를 짓눌렀다. 윙, 하고 낮게 울리는 컴퓨터 팬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나는 모니터 속 김태준 비서의 젊은 얼굴과 그 옆에 선 낯선 형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등 뒤에 선 준서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의 절망이 전염병처럼 번져와 온몸의 피를 차갑게 식혔다.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내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지만, 시선은 모니터에서 떼지 않았다.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서 오빠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설명? 뭘 더 설명해야 합니까?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그게 전부야. 우리가 평생을 외면하며 살아온 지옥의 입구라고!”

준서는 내 옆으로 다가와 컴퓨터 전원 버튼을 거칠게 눌러버렸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 되자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의 눈은 공포와 분노, 그리고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한서 형이 해준 이야기는… 전부 동화에 불과해. 서영그룹 윤 회장이 아들을 잃고 미쳐서 어머니를 위협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진짜 악마는… 처음부터 우리 곁에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김 비서님이 악마라는 거야?”

“그 사람 혼자였을까? 이 거대한 저택 전체가 악마의 소굴이야! 당신은 그걸 몰라. 어머니는 그 소굴에서 당신 하나 살리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잡아먹힌 거라고! 그런데 당신이 제 발로 다시 기어 들어왔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거야!”

그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고, 쾅 하는 굉음이 자료실을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의 절규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곪아 터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 같은 것이었다.

“25년 전 그 교통사고… 단순한 음주 뺑소니가 아니었어.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우리 그룹 차량도 우연이 아니었고! 모든 게 계획된 거였어. 윤 회장의 아들을 제거하고, 그걸 빌미로 서영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계획!”

“누가… 누가 그런 짓을… 아버지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의심이 튀어나왔다. 준서는 비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럴 깜냥도 못 되는 사람이야. 그저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걸 망쳐버린 바보일 뿐이지. 그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한 건… 언제나 아버지의 그림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어. 당신이 오늘 마주친 바로 그 악마, 김태준 비서 같은 인간들 말이야.”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김태준 비서가 모든 일의 배후였다니. 그렇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

“왜…?”

“글쎄. 돈? 권력? 아니면 그저 재미로? 그 속을 어떻게 알겠어. 중요한 건, 어머니가 그들의 계획을 눈치챘다는 거야. 그래서 당신을 빼돌린 거고. 그 대가로 어머니는….”

준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자료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서 오빠였다. 그는 잠 못 이루고 나를 찾아다닌 듯, 헝클어진 머리에 다급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준서, 너 하린이한테 또…!”

한서 오빠는 우리 둘 사이의 살얼음 같은 분위기와 암전된 컴퓨터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는 준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하린이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거야!”

“형이야말로 위선 떨지 마!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건데! 이 애가 나타난 순간부터 우린 이미 끝났어! 그자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머니의 유일한 핏줄이, 자신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거가 살아 돌아왔는데!”

두 형제의 격렬한 싸움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서 오빠의 보호는 진실을 덮으려는 시도였고, 준서의 적의는 진실이 가져올 파멸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며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이 집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나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자, 폭풍의 눈이었다.

결국 한서 오빠가 먼저 주먹을 풀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과 원망, 그리고 깊은 슬픔으로 뒤섞여 있었다.

“하린아… 가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그가 내 팔을 이끌었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준서에게 다가갔다. 그는 벽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알려줘. 25년 전 사고를 수사했던 그 형사… 누구야?”

준서는 대답 대신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 대신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 어렸다.

“당신도 결국… 어머니와 똑같은 길을 가려는군. 그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은 숨 막히는 연극 무대와 같았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신문을 읽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고, 한서 오빠는 핏기 없는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준서는 아예 식탁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어젯밤의 폭풍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저택의 아침은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평온함 아래에 들끓는 용암이 있다는 것을.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김태준 비서에게로 향했다.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주름 하나 없는 칼 같은 정장. 어젯밤 준서가 말한 ‘악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내 숨통을 조여왔다. 그가 내게 주스를 따라주기 위해 다가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끝에서 차가운 독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기름을 친 듯 부드러웠다. 나는 그 위선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잠을 좀 설쳤나 봐요.”

내 대답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나는 네가 어젯밤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그때, 아버지가 신문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하린아, 마침 잘 됐구나. 이번 주말에 네가 자랐던 ‘햇살 보육원’에 그룹 차원에서 후원 행사를 하기로 했다. 네가 직접 가서 아이들도 만나고, 선물도 전해주면 의미가 깊을 것 같구나. 태준이가 잘 준비해 줄 거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햇살 보육원. 내가 25년을 살았던 곳. 그곳에 김태준 비서와 함께 가라고?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또 다른 경고일까. 내 심장이 불안하게 내달렸다. 내 옆에 앉은 한서 오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그건 좀… 하린이가 아직 적응할 시간도 필요한데, 굳이 옛날 생각나는 곳에….”

“아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지. 과거를 마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안 그러니, 하린아?”

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함정일지라도, 나는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그곳에, 내가 놓친 또 다른 진실의 조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네, 아버지. 좋은 생각이에요. 기쁘게 갈게요.”

내 대답에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김태준 비서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지옥 같은 식탁에서 도망치듯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집안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주말이 오기 전에, 보육원에 가기 전에, 반드시 그 형사를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김 비서와 단둘이 그곳에 가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문제는 어떻게 그를 찾느냐였다. 저택의 컴퓨터나 전화는 분명 감시당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지갑에 있던 비상금 몇 푼을 챙겨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태준 비서에게 외출을 요청하는 대신, 일부러 인적이 드문 후문을 이용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까 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가장 가까운 공공 도서관으로 향했다.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어젯밤 보았던 기사,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형사의 이름. ‘박철민’. 나는 그의 이름을 중심으로 25년 전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그는 그 사건 이후 몇 년 뒤 경찰을 그만두었다는 기사가 마지막이었다. 퇴직 사유는 일신상의 이유. 너무나도 모호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경찰청 데이터베이스나 인명 검색 사이트 같은 곳을 닥치는 대로 뒤졌다. 동명이인이 수십 명 나왔지만, 나이와 경력을 대조하며 끈질기게 추적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나는 마침내 그로 추정되는 사람의 연락처 하나를 찾아냈다. 지금은 작은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보와 함께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주머니 속 동전을 그러모아 전화기에 넣고,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길고 긴 신호음이 내 애를 태웠다. 제발, 제발 받아라.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나이 든 남자의 거칠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실례지만, 박철민… 전직 형사님 되십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담배 연기 내음이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누구요.”

“저는… 25년 전 서영그룹 외아들 교통사고 사건에 대해 여쭤볼 게 있어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끊어. 다 끝난 일이야.”

“잠깐만요! 제발요! 저는… 저는 강 회장 딸, 강하린이에요! 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일일지도 몰라요!”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나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포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 낮았다.

“강하린이라고 했나.”

그는 내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죽은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멍청한 아가씨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