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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화: 심연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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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멍청한 아가씨로군.”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는 닳아빠진 사포처럼 거칠었다. 공중전화 부스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눅눅한 먼지가 뒤섞인 공간이 나를 질식시킬 듯 옥죄어왔다. 그의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겪고 난 자의 체념이었고, 심연을 들여다본 자의 서늘한 경고였다.

“멍청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알아야만 해요. 제 어머니가 왜 그렇게….”

“네 어미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나? 그 진실이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해?”

그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낮아졌다. 나는 땀으로 축축한 수화기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제 목숨은… 25년 전에 이미 한번 버려졌어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요. 제발… 만나주세요. 뭐든 드릴게요. 돈이라도….”

“돈?”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는 마치 녹슨 쇠가 긁히는 것처럼 불쾌했다.

“아가씨, 돈으로 살 수 없는 목숨이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네 아비가 가진 그 돈 때문에 네 어미가 죽은 거야.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포기해야 하나. 이대로 돌아서야 하나. 그 순간,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계셨던 게 뭔지 아세요? 제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낡은 은팔찌였어요. 저를 버린 게 아니라, 지키려고 하셨던 거예요. 그 마음을 짓밟은 게 누군지 알아야겠어요. 당신이 그걸 모른 척한다면… 당신도 공범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내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서 광음처럼 울렸다. 제발. 제발. 간절한 기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 두 시. 종로 3가 ‘쌍화 다방’. 혼자 와. 십 분이라도 늦거나, 누구라도 달고 오는 날엔, 이 통화는 없었던 일이다. 명심해. 네 뒤에는 언제나 눈이 붙어있다는 걸.”

툭.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뚜- 뚜- 하는 공허한 신호음만이 전화 부스 안을 채웠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로 벽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차가운 유리가 등을 파고들었다. 나는 마침내 지옥의 문고리를 잡은 것이다.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한서 오빠의 감시 같은 걱정을 피해 외출 준비를 했다. ‘친구를 만난다’는 어설픈 거짓말을 했지만, 그의 의심 가득한 눈빛은 내 등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나는 일부러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옷을 골라 입고 저택을 나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후문을 이용했다. 모든 걸음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웠다. 어제 박철민이 했던 경고, ‘네 뒤에는 언제나 눈이 붙어있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약속 장소인 ‘쌍화 다방’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짙은 갈색 문이 나를 맞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진한 계피 향, 그리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훅 끼쳐왔다. 시야가 흐릿할 정도의 자욱한 연기 너머로, 몇몇 늙은 손님들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정확히 두 시였다. 나는 가장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희끗희끗한 머리, 깊게 파인 주름, 그리고 세상사에 무심한 듯 찌푸린 미간. 어제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거친 목소리의 주인이 분명했다. 박철민. 그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보고도 시선 한번 주지 않고, 탁자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앉아.”

그는 턱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앉았다. 끈적한 비닐로 덮인 의자의 감촉이 불쾌했다.

“강하린이라.”

그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은 잿빛이었다. 모든 감정이 타버리고 재만 남은 듯한 공허한 눈. 그 눈빛에 담긴 피로감은 그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어미를 꼭 빼닮았군. 그 빌어먹을 고집까지도.”

“제 어머니를… 잘 아셨나요?”

“잘 알았지. 지독할 정도로. 그래서 말리는 거야. 그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내가 똑똑히 봤으니까.”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방 안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듯했다.

“어머니의 죽음… 사고가 아니었죠? 서영그룹 윤 회장 아들의 교통사고도… 전부 계획된 거였고요.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죠?”

박철민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낡은 주전자를 들어 내 찻잔에 뜨거운 쌍화차를 따라주었다. 걸쭉하고 시커먼 찻물이 찻잔에 채워졌다. 진한 한약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가씨, 이 바닥을 체스판이라고 치자. 그럼 네 아비 강 회장은 킹이야. 화려하지만 무능하고,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지. 한서나 준서 같은 놈들은 나이트나 비숍쯤 될 거고.”

그는 자신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이 판을 실제로 움직이는 건 그런 말들이 아니야. 킹을 움직이게 만들고, 다른 말들을 희생시키면서 판 전체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사람들은 그걸 ‘킹메이커’라고 부르지.”

“킹메이커… 그게 김태준 비서인가요?”

내 질문에 그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는 경멸과 함께 약간의 감탄마저 섞여 있었다.

“이제야 좀 이야기가 통하는군. 그래, 김태준. 그놈은 그냥 비서가 아니야. 네 아비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뒤에서 모든 더러운 일을 처리해 온 해결사였지. 서영그룹을 무너뜨린 것도, 윤 회장 아들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인 것도, 전부 그놈 머리에서 나온 그림이야.”

준서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문제는 네 어미가 그 계획을 알아챘다는 거지. 그리고 그 계획의 증거를 손에 넣었어. 네 어미는 그걸로 김태준을 협박했지. 너와 함께 조용히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게 그 여자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어.”

“실수라뇨?”

“악마에게 협상이 통할 거라고 믿은 거. 김태준은 네 어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했어. 너를 안전한 곳으로 빼내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리고 네 어미가 너를 김 비서에게 맡기고 약속 장소로 나간 그날 밤… 모든 게 끝장난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어미는 자살로 위장됐어. 김태준이 손에 넣은 증거는 사라졌고, 나는 그 사건을 조용히 덮으라는 압력을 받았지. 거부했다간 내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협박과 함께. 그래서 경찰 옷을 벗은 거야. 더러워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했고, 결국 그 악마에게 잡아먹힌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감각이 없었다.

“증거… 어머니가 가졌던 증거가 대체 뭐였는데요?”

“나도 몰라. 하지만 그게 김태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치명적인 물건이었던 것만은 확실해.”

그는 품 안에서 낡은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가 그의 입에서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아가씨. 이쯤에서 멈춰. 더 파고들었다간 너도 네 어미처럼 되는 거야. 김태준은 그림자가 아니야. 그놈은… 그림자를 만드는 놈이라고.”

“싫어요. 멈출 수 없어요. 이대로는… 어머니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내 단호한 대답에 박철민은 나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봤다. 그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 고집은 어쩔 수가 없구먼.”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다시 비벼 끄더니, 안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낡고 녹슨 사물함 열쇠였다.

“서울역 지하 2층, C구역 38번 사물함. 거기에 내가 25년간 간직해 온 게 있어. 네 어미가 죽기 직전, 내게 몰래 남긴 마지막 물건이야. 아마 김태준이 그토록 찾던 증거의 일부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희망의 빛 한 줄기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열쇠를 집어 들자, 그가 마지막 경고를 덧붙였다.

“그걸 여는 순간, 너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김태준뿐만이 아니야. 그와 연결된 모든 놈들이 너를 쫓을 거다. 그래도… 감당할 수 있겠나?”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제가 감당해야 할 제 몫이에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다방을 나와 차가운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내 손안에는 묵직한 진실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동시에 내 안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서울역 사물함.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박철민의 경고처럼, 내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눈들이 가득할 터였다. 주말, 보육원에 가는 날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날이라면 김 비서의 감시가 가장 허술해질 테니까.

저택의 후문에 다다랐을 때, 정원 한쪽에서 한서 오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하린아!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그가 달려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다정한 걱정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오빠.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무슨 일 있는 거지? 제발 나한테 말해줘.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의 품에 안겨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또한 이 거대한 침묵의 공범자였다. 내가 손에 쥔 진실은, 어쩌면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가족 전체를 무너뜨릴 칼날일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오빠. 정말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서운함과 상처를 모른 척하며 서둘러 내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잠그자마자, 나는 긴장이 풀려 벽에 등을 기댔다. 손에 쥔 열쇠의 차가운 감촉이 선명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젯밤과 똑같은 내 방, 똑같은 풍경. 하지만 나는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심연의 속삭임을 들었고, 그 끝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히 아침에 닫아두었던 서랍장 세 번째 칸이, 아주 미세하게, 1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왔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나를 감시하는 눈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위이잉-.

드레스룸 선반 위에 놓아두었던 내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인 표시 제한. 모르는 번호였다. 불안한 예감에 휩싸여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 창에는 글자 하나 없이, 사진 한 장만이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것은 방금 전, 내가 저택의 후문을 통해 몰래 들어오던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아주 교묘한 각도에서 찍은, 명백한 도촬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