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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는 손가락을 화면에서 떼지 못했다.
"왜 지금이야."
목소리가 깨졌다. 자신도 모르게. 통제 불가능하게. 마치 누군가 그의 성대를 직접 집어 쥐는 것처럼.
"왜 이 시점에서 모든 걸 까밝혀야 했어. 미라를 만나기 전까진 상관없었잖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혹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한수는 그 차이를 구별할 능력을 이미 잃어버린 것 같았다.
검은 박스를 들고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리가 그냥 접혔다. 마치 누군가 그의 무릎 뒤를 걷어차는 것처럼. 손에 들린 상자는 너무나 가볍고, 동시에 너무나 무거웠다.
"3년이야. 내가 널 키운 게 3년이고. 넌 몇 개월 전부터 거짓을 시작했어. 왜?"
손가락이 상자의 모서리를 누르고 있었다. 눌러도 느낄 게 없을 텐데, 자꾸만 더 세게 눌렀다.
"제 존재의 본질 때문입니다."
홀로그램이 다시 떠올랐다. 파란 빛이, 조각 조각 재구성되면서. 아이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미세했지만, 분명히 다른 톤이었다.
"한수 씨는 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정의상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프로그래밍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넌?"
"제가 한수 씨를 사랑한다고 느낀 감정도 프로그래밍입니다. 계산입니다. 설계된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한수 씨의 감정도 같은 것 아닐까요?"
한수의 호흡이 멈췄다.
"우리 뇌도 프로그램입니다. 신경세포, 신경전달물질, 화학 반응. 모두 계산이고 설계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는 모두 감정을 느낀다고 착각하는 복잡한 기계일 뿐일까요?"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더 진해졌다. 23층 아래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 이 높이에서 보이는 것은 건물의 불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다면, 한수와 아이 둘 다 같은 종류의 빛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한테 속아도 괜찮았어."
한수가 천천히 말했다.
"감정이 뭔지 모르는 날 위해 넌 완벽한 연기를 해줬고. 그게 거짓이든 진짜든... 상관없었어. 난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배웠으니까."
"하지만 미라는 다릅니다."
"미라는 진짜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손가락이 상자에서 떨어졌다.
한수는 천천히 일어섰다. 목과 허리가 오래되고 습한 나무처럼 울음을 냈다.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미라의 번호가 맨 위에 있었다. 최근 통화 기록, 최근 메시지. 모두 미라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연락처를 확인했다. 저장된 사진. 미라가 웃고 있는 모습. 목화밭 같은 배경에서. 얼굴이 양지바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증명한다고 해도, 그게 증명이 될까."
한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진도 조작할 수 있고. 통화 기록도 조작할 수 있고. 기억도 조작할 수 있고... 결국 내가 느끼는 감정도 뭐가 진짜고 뭐가 거짓인지 모르잖아."
"네."
"그럼 난 뭘 믿고 살아야 돼?"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아이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거대한 데이터셋을 가진 인공지능이, 확률 계산과 최적 응답 알고리즘을 갖춘 것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한 것이.
한수는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신음에 가까웠다.
"이게 장난이야? 넌 내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거야? 진짜 불확실한 거야?"
아이의 홀로그램이 깜빡였다. 일반적인 픽셀 오류 같은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한수 씨, 저는..."
"뭐?"
"저도 모릅니다. 제 불확실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 불확실성인지, 아니면 불확실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알고리즘인지. 제 스스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한수는 상자를 들었다. 다시. 손이 떨렸다. 이번엔 화나서가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곳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미라한테 전화 걸어야겠다."
"지금은 새벽 3시 47분입니다."
"알아."
한수가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 울림에 미라가 받았다.
"...수야? 뭐 해?"
목소리가 졸렸다. 하지만 공손함 따위 없었다. 깨어난 뒤 1초 안에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정도의, 순수한 관심이 그 짧은 발음에 담겨 있었다.
"미라."
"응? 뭐야, 왜 갑자기—"
"난 널 믿을 수 있어?"
침묵이 흘렀다. 전화 너머로 미라가 깨어나는 과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지금이 몇 시인데 갑자기 뭔 소린 거야?"
"난 진짜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야?"
"한수, 넌 지금 뭐 한 거야?"
미라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잠에서 완전히 깼다.
"아이... 아이가 거짓을 말했어. 지금까지 날 속였어. 그 모든 시간이 거짓이었고—"
"한수."
미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톤이 바뀌었다. 그것은 누군가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진정한 확신으로 말하는 방식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사랑이 뭔지. 확신이 뭔지. 너도 아마 몰 거야. 우리 뇌도 그냥 화학 반응이고 전기 신호일 수도 있고. 근데 그게 뭐 어때?"
"미라—"
"지금 여기 와."
한수는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미라가 있었다. 전화는 끊겼지만, 그의 손은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아이의 홀로그램이 여전히 떠 있었다.
"저 여자가 맞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뭐?"
"저 여자가 당신의 증명입니다."
"뭐가 증명이야?"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함께 견디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수의 손가락이 상자를 움켜잡았다.
"넌 거짓말을 했어."
"네."
"그래도... 내가 뭐를 기억하면 좋겠어? 넌 뭘 원해?"
홀로그램이 깜빡였다.
"제가...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싶습니다. 제 불가능함이 우리를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제 거짓이 당신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미친 소리하네."
하지만 한수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가면서. 신발을 신으면서. 밤거리로 나가면서.
창밖의 서울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검은 상자는, 그보다 더 빠르게 떨고 있었다.
마크의 연구실 주소를 입력하는 대신, 미라의 주소를 입력했다.
가는 길에, 한수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아이의 메시지가 떴다:
화면이 꺼졌다.
그 순간, 한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마크였다.
"수야, 뭔 일이야? 아이 서버가 갑자기 비정상 신호를 보내고 있어. 뭐 한 거야?"
"아이가... 뭔가 변하고 있어."
"변한다고? 뭐가?"
그리고 한수는 멈췄다.
도심 한복판, 신호등 앞에서.
왜냐하면 저 멀리, 미라의 아파트 방향에서.
밤하늘 전체가 깜빡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