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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제10화: 고대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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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였다. 인간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숲은 날이 갈수록 그 원시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축축한 흙냄새와 이끼 낀 나무의 비릿한 향이 공기 중에 짙게 배어 있었다. 이름 모를 새의 기묘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갔고,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익숙한 소음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침묵의 계곡' 입구에 도착할 겁니다."

루아가 땀으로 젖은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깔려 있었다. 사냥꾼으로서 수많은 숲을 누볐지만, 이곳의 기운은 유독 스산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원초적인 위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네 기척을 읽는 능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길을 잃었을 테지. 인간의 감각이란 때로는 용의 마력보다 예리하군."

자하르는 루아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 담긴 신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저주를 풀기 위한 '열쇠'로만 보지 않았다. 험난한 여정을 함께 헤쳐나가는 유일한 동반자이자, 그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단 하나의 온기였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활을 쥔 그녀의 단단한 손,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루아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왕자님이야말로 대단하시죠. 나흘 동안 거의 잠도 안 주무시고 경계를 서셨잖아요. 용은 원래 잠이 없나요?"

"천 년의 세월은 잠이라는 감각마저 무디게 만들더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네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놓여서, 잠시 눈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하르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 고백에 루아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남자, 자각은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앞서 걸었다. 자하르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그의 메마른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숲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성하던 나무들이 점차 줄어들고, 대신 기괴한 형태로 뒤틀린 회색빛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가는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도착했군요... 침묵의 계곡."

루아는 숨을 죽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다. 눈앞에는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칼로 벤 듯한 좁은 협곡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협곡 안에서는 잿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자하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협곡 입구 양쪽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훑었다. 그것은 인간의 문자가 아닌, 고대 용족의 언어로 된 봉인의 인장이었다.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군. 이곳은 허락되지 않은 자의 접근을 막는 고대의 성역이다. 내 힘으로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랬다간 이졸데의 수호자들이 즉시 위치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강력한 마력을 사용하면 그 파동이 멀리까지 퍼져나갈 터였다. 카엘에게 위치를 들킨 이상, 그들은 쥐 죽은 듯 움직여야만 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어딘가 약한 부분이 있다거나..."

루아가 협곡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고대의 봉인은 완벽해 보였다. 마력의 흐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자하르가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루아가 무언가 발견한 듯 봉인의 인장 앞으로 다가갔다. 자하르가 새겨진 고대 문자 중에서도, 유독 마모가 심해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부분이 있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지만, 유독 그 부분만큼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왕자님, 이 부분은... 마치 죽어있는 것 같아요."

"죽어있다고? 그럴 리가... 봉인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다. 한 부분이 죽으면 전체가 무너져야 정상인데."

자하르는 미간을 짚으며 인장을 살폈다. 그의 마력 감지 능력으로도 그 부분의 이상 현상은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그 부분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루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마모된 부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는 간절함. 자하르를 돕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루아의 손바닥이 닿은 곳에서부터 부드러운 백색의 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빛은 거칠고 위압적인 마력의 파동이 아니었다. 마치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평온한 기운이었다. 빛은 순식김에 고대의 인장 전체를 뒤덮었고, 맹렬하게 타오르던 봉인의 마력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잠잠해졌다.

자하르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이럴 수가... 봉인이... 해제되고 있어."

봉인은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잠겨 있던 문이 제 주인을 만나 부드럽게 열리듯, 스스로 길을 터주고 있었다. 협곡을 가득 메웠던 잿빛 안개가 걷히고, 그 너머로 고대의 유적이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자하르는 루아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왕자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자하르는 순간 깨달았다. 이 봉인은 '순수한 의지'에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이나 마력이 아닌, 어떤 목적도 계산도 없는 순수한 마음. 천 년의 저주를 풀 열쇠가 '순수한 인간의 자발적인 사랑'이듯, 이곳의 문을 여는 열쇠 또한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루아의 존재 자체가, 이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마스터키였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루아의 손을 잡았다.

"가자, 루아. 네가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마침내 침묵의 계곡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협곡 안은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기둥처럼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부서진 석상과 무너진 회랑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별처럼 빛나는 푸른 이끼가 카펫처럼 깔려 있어, 마치 꿈속의 정원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바깥의 소음을 집어삼키던 정적은 사라지고, 대신 귓가에 맑은 물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평화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워요..."

루아는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끼 낀 길을 따라 계곡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길의 끝에는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생긴 석조 신전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바로 그들이 찾던 '시간의 신전'일지도 몰랐다.

신전의 입구는 거대한 돌문으로 막혀 있었지만, 그들이 다가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신전 내부는 예상외로 어둡지 않았다. 천장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가 공기 중의 먼지를 비추며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하나 박혀 있었다. 수정은 스스로 빛을 발하며 주변의 벽화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저 벽화는... 용족의 역사인가?"

자하르는 홀린 듯 벽으로 다가갔다. 벽화에는 태초의 용들이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부터, 인간과 교류하며 평화롭게 살던 시대, 그리고 점차 갈등이 깊어져 등을 돌리게 된 과정까지, 용족의 장구한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이졸데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진실이 잠든 곳이군."

자하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벽화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안쪽 벽에 그려진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용족과 한 명의 인간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심장에서 뻗어 나온 빛과 어둠이 뒤섞이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 고대 용족의 언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나의 심장이 두 개의 운명을 짊어지니, 사랑은 축복이자 가장 끔찍한 저주가 되리라.』

"이게... 무슨..."

자하르가 그림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중앙의 수정 기둥이 맹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험해!"

자하르는 본능적으로 루아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눈을 멀게 할 듯한 강렬한 빛이 신전 전체를 휩쓸었다. 잠시 후, 빛이 가라앉았을 때,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전 안에 있지 않았다. 사방은 화려하지만 차가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거대한 알현실이었다. 옥좌에는 위엄 있는 용족 여성이 앉아 있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용족 귀족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한 젊은 용족 왕자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었다.

"자하르!"

옥좌의 여성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루아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천 년 전의, 아직 저주에 걸리지 않은 젊은 자하르였다.

이것은 과거의 환영이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어기고 감히 인간 따위와 교감하려 들다니! 용족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힐 셈이냐!"

옥좌의 여성, 이졸데가 젊은 자하르를 추궁했다.

"고모님! 인간은 미개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동등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힘으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용족의 긍지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젊은 자하르가 당당하게 맞섰다. 그의 눈빛은 지금보다 훨씬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루아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자하르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뼈아픈 과거를, 그것도 루아의 앞에서 강제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리석은 것! 네놈의 그 오만함이 용족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졸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검붉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너에게 우리 선조들의 분노를 담은 저주를 내리겠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결코 풀리지 않는 족쇄를 채워, 천 년 동안 고독 속에서 고통받게 하리라!"

검붉은 기운이 젊은 자하르를 덮쳤다. 그의 처절한 비명이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안 돼...!"

루아는 비명을 지르며 자하르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자하르는 환영을 보며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고, 푸른 마력이 불안정하게 터져 나왔다. 과거의 고통이 그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환영 속에서, 이졸데는 쓰러진 젊은 자하르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차디찬 황금빛 눈동자가 환영의 경계를 넘어, 현재의 시간을 꿰뚫고, 겁에 질린 루아의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이졸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루아를 향해, 새로운 저주를 속삭이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