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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제11화: 핏줄에 새겨진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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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천 년 전의 망령이 현실을 꿰뚫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루아의 영혼을 움켜쥐었다. 환영 속의 이졸데, 그녀의 차디찬 황금빛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생생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수정 기둥은 시간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강력한 의지를 현재로 불러오는 매개체였다.

이졸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공간을 건너뛰어 루아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얼음 송곳이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듯한,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속삭임이었다.

『가여운 것. 용의 저주를 풀 유일한 열쇠라 믿고 있겠지.』

루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쥐는 듯한 압박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옆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하르의 신음 소리마저 멀게만 느껴졌다. 오직 이졸데의 목소리만이 온 세상을 지배했다.

『허나 기억하거라, 인간 계집. 네놈의 그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의 심장을 꿰뚫는 가장 날카로운 독(毒)이 되리니.』

독.
그 한 단어가 루아의 정신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그녀가 자하르에게 품었던 모든 따스한 감정, 그를 구원하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 위로 차가운 독액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구원이 아니라 파멸이라고? 나의 사랑이 그를 죽일 것이라고?

『그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너의 존재는 그의 잠든 용의 본능을 일깨우는 저주가 될 것이다. 그는 결국 너로 인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괴물이 되어, 제 손으로 가장 사랑하는 것을 찢어발기게 될 터. 그것이 네년과 자하르에게 내려진 진정한 운명이다!』

"아... 아아..."

루아의 입에서 의미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졸데의 목소리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용족의 피와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거스를 수 없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루아!!!"

과거의 고통에 잠식당해 있던 자하르가, 그녀의 희미한 비명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번개처럼 번뜩이며 이성을 되찾았다. 자신의 고통보다 루아의 위험을 먼저 감지한 본능이었다. 그는 이졸데의 망령이 시공을 넘어 루아에게 손을 뻗치고 있음을 직감했다.

"감히... 네년이 아직도 나를 능멸하는가!"

자하르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라지크나 카엘 앞에서 보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분노의 포효였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그 과거가 루아를 위협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사라져라!!!"

그의 외침과 함께, 푸른 마력의 충격파가 수정 기둥을 향해 날아갔다. 쨍그랑! 거울이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천 년 전의 알현실을 비추던 환영이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시간의 파편들이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신전 안은 다시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헉... 허억..."

자하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단 한 번의 마력 방출에 온몸의 기력이 소진된 듯,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비틀거리며 루아에게 다가갔다.

"루아! 괜찮으냐, 루아!"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루아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토해내며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창백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왕자님..."

"그 여자가... 이졸데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게 무슨 말을 했지?"

자하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루아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당신의 사랑이 독이 될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그의 천 년의 희망을 제 손으로 꺾어버리는 짓이었다.

"아무...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환영이 너무 생생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입술과 핏기 가신 얼굴은 그녀의 말을 전혀 대변해주지 못했다. 자하르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더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 먼저였다.

그는 말없이 루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 소리가 쿵, 쿵, 격렬하게 울리며 그녀의 귓가에 전해졌다. 그의 체온은 식은땀 때문에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루아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주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이런 끔찍한 기억을 보게 해서."

자하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낮게 울렸다. 루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의 과거를 직접 목격함으로써 그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채 침묵을 지켰다. 신전 안은 다시 태고의 정적에 휩싸였다. 중앙의 수정 기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영롱한 빛을 되찾았지만, 그 표면에는 거미줄 같은 미세한 균열이 남아 있었다.

"이제 알겠다."

자하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루아를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다시 벽화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직 불안정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나의 저주는 단순한 분노의 산물이 아니었어. 그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그는 환영이 시작되었던, 용족과 인간이 마주 선 벽화 앞에 섰다.

"저 그림 속의 용족은 나의 먼 선조이신 '아르카디우스' 대왕이시다. 그는 용족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했던 분이지. 그리고 저 여인은... 그가 사랑했던 인간 여인, '엘라라'다."

자하르의 설명에 루아도 벽화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이졸데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지만, 애써 눈앞의 진실에 집중하려 했다.

"이졸데는 내가 아르카디우스 대왕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내가 인간과 교감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들자, 과거의 비극이 되풀이될 것이라 생각한 게지. 그래서 그는 아르카디우스 대왕이 겪었던 고통을 내게 똑같이 덧씌운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저주'란, 결국 그 사랑 때문에 파멸하라는 악독한 함정이었던 셈이야."

자하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천 년 묵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가 고모의 뒤틀린 신념과 정치적 야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루아는 벽화 속 여인, 엘라라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림은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흐릿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림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왕자님... 이 여인이 하고 있는 목걸이..."

루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엘라라의 목에 걸린, 초승달 모양의 작은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림은 정교하지 않았지만, 그 형태만큼은 또렷했다.

"목걸이? 용족과 인간 사이의 맹세의 증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자하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루아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깃을 헤치고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닳고 닳아 은빛이 바랜 작은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

벽화 속 엘라라의 목에 걸린 것과, 형태가 완벽하게 똑같았다.

순간, 신전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자하르의 시선이 벽화와 루아의 펜던트를 번갈아 오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묘한 일치.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왜 저주를 푸는 열쇠가 하필 '순수한 인간의 자발적인 사랑'이었는가.
왜 루아의 순수한 의지가 이곳 성역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었는가.
왜 이졸데의 망령은 천 년의 시간을 넘어 루아에게 직접 말을 걸었는가.

모든 것이 처음부터 하나의 점을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자하르의 입에서 절망적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루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과 연민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깊은 공포와 경악,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자의 처절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설마... 그 저주가... 처음부터 너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전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고, 미세한 균열이 갔던 중앙의 수정 기둥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두 동강 났다.

수정이 깨지자, 그 안에 갇혀 있던 고대의 마력이 폭주하며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동시에 바깥 협곡에서도 땅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자하르 왕자! 그 더러운 인간 계집과 함께 거기 숨어 있었군!"

협곡 입구에서부터 카엘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봉인이 깨진 여파로 그들이 이곳의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이제 퇴로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하르에게는 용족 수호자의 추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눈앞의 루아와, 그녀의 목에 걸린 펜던트, 그리고 방금 깨달아버린 저주의 끔찍한 진실에 쏠려 있었다.

저주는 무작위의 인간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단 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바로 비극적인 사랑의 역사를 되풀이할 운명을 타고난, 엘라라의 마지막 후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