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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광!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신전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제 몸을 부수기 시작했다.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요동쳤고, 산산조각 난 수정 기둥의 파편에서는 제어되지 못한 고대의 마력이 번개처럼 터져 나와 사방의 벽을 닥치는 대로 할퀴었다. 뿌연 돌먼지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숨을 막았다.
"루아, 뛰어!"
찰나의 순간, 정신을 차린 것은 자하르였다. 그는 자신의 핏줄에 얽힌 끔찍한 진실을 곱씹을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루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기며, 거대한 석상이 쓰러지는 방향과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굉음과 함께 그들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육중한 돌덩이가 덮쳤다.
"왕자님! 저주가... 저주가 저 때문이라는 게 무슨..."
루아는 돌먼지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차갑게 식어 쇄골에 달라붙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머니의 따스한 유품이 아니었다. 비극을 예고하는 저주의 낙인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자하르는 대답 대신 포효하듯 외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공포, 절망,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분노가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루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졸데가 속삭였던 예언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네놈의 그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의 심장을 꿰뚫는 가장 날카로운 독(毒)이 되리니.’
아니, 사랑은 독이 아니었다. 이 저주의 진짜 독은, 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루아’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의 핏줄, 그녀의 영혼이 자신의 잠든 본능을 깨우는 기폭제였다. 이졸데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이 덫을 설계한 것이다.
쿵! 쿵! 쿵!
신전 바깥에서 땅을 울리는 거대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용족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은 무너지는 신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왕자를 회수하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이쪽이다!"
자하르는 벽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르카디우스와 엘라라가 그려진, 모든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그 그림. 그는 무너지는 기둥 파편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벽을 향해 남은 마력을 쥐어짰다. 그의 손바닥에서 응축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오자, 벽의 일부가 모래처럼 스르르 허물어지며 어두운 통로를 드러냈다. 용족의 성소에 비상시를 대비해 만들어 둔 비밀 통로였다.
"들어가! 어서!"
자하르는 루아의 등을 떠밀어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 들어가자마자, 입구는 다시 두꺼운 암석으로 위장하며 닫혔다. 바깥의 굉음과 진동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 벽에서 스며 나온 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촉, 그리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증거였다.
***
비밀 통로는 가파른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더 이상 무너지는 신전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은 지하로 내려왔을 때, 자하르는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그의 손은 여전히 루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하의 침묵은, 무너지는 신전의 소음보다 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루아는 어둠 속에서 자하르의 실루엣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왕자님 얼굴이... 아까부터 너무 무서워요. 저주가 저 때문이라니요? 제 목걸이가 대체 뭐길래..."
자하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마치 불에 덴 듯 화들짝 손을 떼는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길이 떠나자, 루아의 손목에 싸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대는 이제 나를 떠나야 한다."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전의 서툴고 어색했던 구애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천 년의 고독을 견뎌낸 용족의 왕자, 그 냉혹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네? 무슨 소리예요, 왕자님? 우리가 어딜 가요? 같이... 같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야죠!"
"방법은 없다."
자하르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이 저주는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파멸만이 예정된 함정이었을 뿐. 신전에서 본 환영이 그 증거다."
"아니에요! 이졸데라는 여자가 한 말은 거짓말일 거예요! 왕자님을 절망시키려는..."
"거짓이 아니다!"
자하르의 외침이 좁은 통로를 뒤흔들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마치 그녀에게서 전염병이라도 옮을 것처럼 거리를 벌렸다.
"이졸데는 진실을 말했어. 너의 존재가 내게 독이라는 것을. 내가 네 곁에 머물수록, 내 안에 잠든 용의 본능은 더욱 난폭하게 깨어날 것이다. 나는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를 해치게 될 테지. 그것이 이 저주의 본질이다."
그는 진실의 절반만을 말했다. 그녀의 핏줄이 저주의 표적이라는 끔찍한 사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그녀를 안전하게 떠나보낼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루아는 그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깊은 절망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왕자님을 믿어요. 왕자님은 절대로 저를 해치지 않아요. 라지크 앞에서도, 카엘 앞에서도, 왕자님은 항상 저를 지키기 위해 싸웠잖아요!"
"그건 아직 저주가 완전히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하르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너는 모른다, 루아. 내 안에서 꿈틀대는 이 파괴적인 충동을. 너의 온기가, 너의 믿음이, 너의 그 순수한 마음이 내 목을 조르는 족쇄를 더욱 강하게 죄어오고 있어! 네가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너를 파괴하고 싶은 괴물이 되어간다!"
거짓이었다. 그녀를 사랑할수록 그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만 했다. 이 모순적인 고통이 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루아는 그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악착같이 참아냈다.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는 정말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싫어요.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왕자님이 괴물이 된다면, 제가 그 괴물을 길들이는 첫 번째 인간이 될게요. 왕자님이 저주에 잠식된다면, 제가 그 저주를 끌어안고 함께 싸울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밀어내지 마세요. 혼자서는... 안 돼요."
그녀의 애원은 자하르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의 단단했던 결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토록 강하고 순수한 영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떠나야 하는데, 그녀 없이는 단 하루도 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영혼이 둘로 찢어지는 듯했다.
자하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루아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어째서...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죽고 싶은 게냐!"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루아는 아픔에 작게 신음했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그를 똑바로 담아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큭."
자하르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아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톱이 날카롭게 길어지며 그녀의 옷자락을 꿰뚫을 듯 파고들었다.
"왕자님...?"
루아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급격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대신해, 맹렬하게 타오르는 황금빛이 비집고 올라오고 있었다. 통로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살얼음으로 변해갔다.
이졸데의 예언.
루아의 존재가 그의 잠든 용의 본능을 일깨우는 저주가 되리라는 그 끔찍한 속삭임.
그것이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녀를 밀어내려는 강렬한 감정의 동요가, 오히려 저주를 폭주시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안... 돼..."
자하르는 괴로운 듯 으르렁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루아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몸은 더 이상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탐욕스러운 포식자의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도망... 가... 루아, 제발...!"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더 이상 온전한 언어가 아니었다. 고대의 용이 내뱉는 듯한, 낮고 위협적인 울림이었다.
루아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하르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푸른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웅-!
그들이 서 있던 통로의 벽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암석 파편과 흙먼지가 두 사람을 덮쳤다. 눈을 가늘게 뜨자, 부서진 벽 너머로 횃불의 섬광과 함께 거대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한 갑옷, 투구 너머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 카엘이었다.
그는 폭주 직전의 자하르와 공포에 질린 루아를 번갈아 보더니, 투구 속에서 만족스러운 비웃음을 터뜨렸다.
"찾았다, 자하르 왕자. 그리고... 보아라, 저주가 제 주인을 찾아 꿈틀대는구나."
카엘의 시선이 루아에게 못 박혔다. 그의 목소리는 잔인한 확신에 차 있었다.
"인간의 독이, 벌써 용의 심장을 좀먹기 시작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