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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이 터져 나가는 굉음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박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돌무더기와 자욱한 흙먼지가 칠흑 같던 통로를 순식간에 회색빛 지옥으로 바꿔놓았다. 루아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부서진 벽 너머, 타오르는 횃불의 불길을 등지고 선 거인의 실루엣이 악몽처럼 다가왔다.
카엘.
그의 투구 속에서 터져 나온 비웃음은 무너지는 암석 소리보다 더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보아라, 저주가 제 주인을 찾아 꿈틀대는구나."
그의 시선은 공포에 질린 루아를 지나, 폭주 직전의 자하르에게 향했다. 자하르의 몸은 경련하듯 떨렸고, 그의 푸른 눈동자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다 마침내 불길한 황금빛에 완전히 잠식당했다. 그의 손톱은 이미 야수처럼 길고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 손아귀에 붙들린 루아의 어깨에서는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인간의 독이, 벌써 용의 심장을 좀먹기 시작했군."
카엘의 목소리는 잔인한 희열로 가득했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육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하 통로 전체가 낮게 울렸다.
"놔...!"
자하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루아를 풀어주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파괴 충동이 그의 모든 신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눈앞의 연약한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끔찍한 본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루아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외쳤다.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대신, 오히려 남은 한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피부 아래로, 비늘이 돋아나는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저를 보세요! 왕자님!"
그녀의 절박한 외침이 그의 의식 가장 깊은 곳을 희미하게 건드린 것일까. 자하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참는 루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카엘을 보았다.
두 개의 위협.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다른 하나는 바깥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자하르는 인간의 성대를 찢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그는 루아를 붙잡았던 손을 뿌리치듯 내던졌다. 루아는 그대로 벽에 등을 부딪혔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자하르가 그녀를 밀쳐낸 힘은, 그녀를 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군. 고작 인간 계집 하나 때문에 그 귀한 힘을 낭비하다니."
카엘이 혀를 차며 성큼 다가섰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워해머가 불길한 마력을 머금고 붉게 타올랐다.
"자하르 왕자. 더는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순순히 용족의 품으로 돌아오시지. 저 천한 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처리해 줄 테니."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자하르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카엘을 향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이성의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순수한 분노와 살의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카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루아를 위협하는 ‘적’을 인식했을 뿐이었다.
"네놈이... 감히..."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지하 통로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흐르던 물기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변했다.
"흥, 그 정도 힘으로 이 몸을 상대하겠다? 저주에 잠식되어 판단력마저 흐려졌군!"
카엘은 워해머를 고쳐 쥐고 그대로 자하르를 향해 돌진했다.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우는 육중한 기세였다.
하지만 자하르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그를 맞받아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양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모두... 부서져라!"
그의 마지막 이성이 담긴 외침이었다.
콰르르르르릉!
자하르를 중심으로, 응축되었던 모든 마력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그것은 적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무차별적인 자폭에 가까운 힘의 해방이었다. 지하 통로의 바닥과 천장, 벽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카엘조차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수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돌려 자신이 뚫고 들어온 입구 쪽으로 후퇴했다.
"루아!"
자하르는 무너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루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눈동자는 다시 위태로운 푸른빛을 되찾아 있었다. 그는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녀의 주위로 희미한 보호막을 쳤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엄청난 양의 암석과 흙더미가 거대한 해일처럼 그들을 덮쳤다. 시야가 암전되고, 의식이 아득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뺨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루아는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사방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이전의 숨 막히는 흙먼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축축한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섞인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으읏..."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자하르가 마지막 순간에 펼쳐준 보호막 덕분일 터였다.
자하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완전히 무너진 통로 아래, 더 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지하 공동으로 떨어진 듯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사방에서는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저 멀리,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왕자님...!"
루아는 다리를 절뚝이며 빛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인광석(燐光石)이 박힌 지하 호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숫가에, 자하르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흠뻑 젖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폭주하던 용의 흔적은 사라지고, 창백한 뺨과 굳게 닫힌 입술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루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젖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뺨에, 루아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바보... 정말 바보 같은 사람..."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체온으로 조금이라도 그를 녹여주려는 듯,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 온기에 반응한 것일까.
"......루아."
자하르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 올려졌다. 초점을 잃었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루아의 얼굴을 담자, 비로소 희미한 생기를 되찾았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왕자님!"
루아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몸은... 마력은요?"
"......괜찮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절망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루아의 어깨를 만지려다, 날카로운 발톱에 찢겨나간 그녀의 옷자락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녀를 해칠 뻔했다는 끔찍한 현실이 다시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봤겠지."
자하르가 고개를 돌려 어두운 호수 수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모래 같았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저주에 잠식된 내가... 어떤 괴물이 되는지를."
"아니에요! 왕자님은 괴물이 아니에요! 끝까지 저를 지켜주셨잖아요!"
"지켰다고? 하마터면 내 손으로 네 숨통을 끊을 뻔했다. 카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천 년을 살아온 용의 왕자가, 한 마리 길 잃은 짐승처럼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루아."
그가 결심한 듯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신전에서 깨달은 진실을... 말해주지."
루아는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의 저주는... 불특정한 인간의 사랑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단 하나의 핏줄을 표적으로 삼고 설계된 함정이었어. 바로... 태초에 용과 사랑에 빠졌던 인간 여인, 엘라라의 후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루아의 손이 저도 모르게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그 펜던트는 그 증표다. 너는... 내가 천 년 동안 찾아 헤맨 저주의 마지막 조각이자, 동시에 내 이성을 파괴할 유일한 기폭제였던 게지. 이졸데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 내가 너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너로 인해 폭주하여 파멸하는 것. 그것이 그 여자가 계획한 복수의 완성이다."
차가운 진실이 비수처럼 날아와 루아의 심장을 관통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이제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덫에 꽁꽁 묶여버린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제 알겠나?"
자하르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잿더미 같았다.
"우리가 함께할 길은 없다.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일 뿐이야. 너는 나를 떠나,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싫어요..."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목이 메어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였다.
"그게 운명이라면... 그 운명이랑 싸울 거예요. 왕자님 혼자 가게 두지 않을 거예요."
"어리석은 소리."
자하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네가 나를 위한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야 해. 그것이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는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지 마세요!"
루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애절한 외침에도 자하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이대로 끝인가.
이 끔찍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헤어져야만 하는 걸까.
루아는 절망감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와 그녀의 목덜미를 따끔하게 찔렀다.
"윽...!"
루아는 짧은 신음과 함께 목을 매만졌다. 작은 침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눈앞이 흐려졌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자하르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그는 쓰러지는 그녀를 부드럽게 받아 안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까의 냉혹함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처절한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가 그녀를 잠재운 것이었다.
"미안하다, 루아."
그는 잠든 그녀의 이마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만이 그대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는 그녀를 인광석이 비치는 호숫가 가장 안전한 곳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자신의 푸른 용의 비늘 한 조각을 떼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위급한 순간에 그녀를 지켜줄, 마지막 미련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홀로, 자신을 쫓는 용족과 자신을 옥죄는 저주를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