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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돌의 감촉이 뺨을 눌렀다.
루아는 물방울이 어둠 속 어딘가로 떨어지며 내는, 섬뜩할 만큼 규칙적인 낙수 소리에 의식을 건져 올렸다.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고,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마지막 기억은 목덜미를 파고들던 따끔한 통증과, 슬픔으로 무너져 내리던 자하르의 얼굴. 그가 자신을 잠재웠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
몸을 일으키자, 욱신거리는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이전의 숨 막히는 흙먼지가 아닌, 서늘하고 축축한 동굴의 냄새였다. 지하 공동으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혼자서.
"왕자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없는 메아리만이 차가운 벽을 타고 돌아왔다. 심장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시렸다. 그가 남긴 말들이, 그의 차가운 눈빛이, 어둠보다 더 짙은 절망이 되어 그녀를 짓눌렀다. ‘너는 나를 떠나,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건 그를 위한 말이 아니라, 오롯이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자신을 괴물이라 칭하며,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다시 고독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
루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여기서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사냥꾼이었다. 칠흑 같은 밤의 숲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고, 굶주린 맹수의 눈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법을 익혔다. 포기하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주먹을 쥐려던 그녀의 손안에서, 차갑고도 매끄러운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을 펴자,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손톱만 한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의 비늘이었다. 자하르가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간 마지막 미련. 비늘 자체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것을 꽉 쥐자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희미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치 그의 마음이 아직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 온기가 꺼져가던 그녀의 심지에 다시 불을 붙였다.
"바보 같은 사람... 누가 당신 마음대로 떠나래요."
루아는 비늘을 소중히 품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를 조금 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서서 동굴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미세하게 바람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출구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발을 옮겼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든, 그를 다시 만나 이 말만은 전해야 했다.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당신 혼자 싸우게 두지 않겠다고.
***
자하르는 피 냄새를 맡았다.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니었다. 흙과 돌먼지, 그리고 축축한 이끼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풍겨오는, 금속성의 비릿한 냄새. 그는 무너진 신전의 잔해 더미 뒤,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마력을 거의 모두 소진한 탓에,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젠장, 일이 귀찮게 됐군. 성소가 무너질 줄이야."
암석 더미 너머에서, 카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또 다른 용족 수호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성급했네, 카엘. 왕자 전하의 마력을 지나치게 자극한 탓이야. 이졸데 님께서 아시면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걸."
두 번째 목소리는 카엘보다 한층 더 차분하고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하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발레리우스'. 용족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이자, 이졸데의 오랜 충복이었다.
"흥, 그 인간 계집만 아니었어도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거다! 그 계집의 핏줄이 왕자 전하의 저주를 폭주시키는 기폭제라는 이졸데 님의 예측이 정확했어. 대체 그 빌어먹을 '엘라라'의 핏줄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카엘의 말에 자하르의 심장이 얼음 송곳에 찔린 듯 아파왔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고통이, 심장의 통증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 문제는 성소의 붕괴가 다른 것을 깨웠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발레리우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 안에는 이졸데의 충복답지 않은, 미묘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다른 것이라니? 고작 인간들이 사는 땅에 용족의 성소보다 더한 것이 있단 말인가?"
"자네는 너무 젊어서 모를 테지, 카엘. 이 성소는 본래... 자하르 왕자 전하의 저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훨씬 더 오래되고 끔찍한 것을 봉인하기 위한 '자물쇠'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천 년 전 아르카디우스 대왕께서 그 '심연의 메아리'를 이곳에 봉인하신 이후로, 용족의 왕가조차 이곳의 존재를 쉬쉬해왔지."
"심연의 메아리...?"
카엘조차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원한을 먹고 자라는 고대의 존재. 형태도, 실체도 없으나 영혼에 직접 파고들어 가장 깊은 절망을 비추고, 그 영혼을 산 채로 뜯어 먹는다고 전해진다. 이졸데 님께서 그토록 자하르 왕자 전하를 용족의 땅으로 데려가려 하셨던 이유 중 하나도, 저주받은 왕자의 불안정한 마력이 혹여나 봉인에 영향을 줄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야."
자하르는 숨을 삼켰다. 자신의 저주가, 그보다 더 거대한 재앙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이졸데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정치적 도구로만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것이... 깨어났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카엘의 목소리에서 오만함이 사라지고, 경계심이 묻어 나왔다.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은 좋지 않은 징조야. 일단 이곳을 정리하고, 이졸데 님께 즉시 보고드려야 한다. 왕자 전하를 찾는 일은 그 이후다. 그 인간 계집은... 운이 좋으면 살아남았겠지. 운이 나쁘면, 가장 먼저 그 '메아리'의 먹이가 될 테고."
발레리우스의 마지막 말은 자하르의 남은 이성을 끊어놓기에 충분했다. 루아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것은 자신의 저주보다, 용족의 추격보다,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공포였다.
그는 바위틈에서 뛰쳐나가 당장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의 자신은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그들이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치욕을 곱씹을 뿐이었다.
루아를 찾아야 한다.
그녀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이 위험한 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자하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루아를 떠나보냈던 슬픔 대신, 그녀를 지켜야만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으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얼마나 올랐을까.
가파른 동굴 벽을 기어오르다시피 한 끝에, 마침내 루아는 한 줄기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좁은 틈새로 몸을 비집고 나갔다. 차갑고 신선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오자,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빠져나온 곳은 신전이 있던 자리에서 꽤 떨어진 숲의 한가운데였다. 주변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고, 땅은 깊게 파여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처럼 보였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매캐한 돌먼지 냄새와, 무언가 타는 듯한 비릿한 오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루아는 사냥꾼의 눈으로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무너진 흙더미 위로, 거대한 갑옷을 입은 자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용족 수호자들의 것이리라. 그들은 이미 이곳을 떠난 듯했다. 그렇다면 자하르는?
그녀는 땅에 낮게 엎드려 흙의 미세한 변화를 읽기 시작했다. 수호자들의 육중한 발자국 사이로,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희미하게 남겨진 또 다른 흔적. 날렵한 전투화를 신은, 혼자만의 발자국이었다. 자하르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살아있다!
루아의 심장이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의 발자국은 수호자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떠난 방향과 정반대,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숲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밤이면 들려와야 할 풀벌레 소리 하나, 부엉이 울음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마치 숲 전체가 숨을 죽이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섬뜩한 정적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자하르의 발자국이 멈춘 작은 공터에 다다랐다. 그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그의 발자국 옆에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루아는 그 흔적을 보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니었다. 맨발이었지만, 그 형태는 기이할 정도로 가늘고 길었다. 발자국 주변의 흙은 마치 생명력이라도 빨린 듯, 바싹 말라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발자국은, 자하르의 흔적을 그대로 덮으며 숲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하르는 제 발로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끌려간’ 것이다.
루아는 허리에 찬 사냥용 단검을 빼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크게 타올랐다. 감히 누가, 나의 왕자님을.
그녀가 다시 추적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등 뒤, 바로 귓가에서 나른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 펜던트, 오랜만이군. 엘라라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