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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는 숲의 정적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 펜던트, 오랜만이군. 엘라라의 아이."
피가 얼어붙는다는 감각을 루아는 처음으로 경험했다. 등 뒤, 불과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온 속삭임. 기척도, 발소리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훈련된 사냥꾼의 본능이 이성을 앞질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몸을 회전시키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은빛 칼날이 달빛을 받아 섬광을 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날아갔다.
챙.
유리잔이 부딪히는 듯한, 어이없을 정도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공격은 막혔다. 아니, 붙잡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창백할 정도로 흰 두 개의 손가락이 그녀의 칼날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마치 날아드는 나비를 잡는 것처럼, 너무나도 손쉽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성급하긴. 너의 선조와는 다른 점이로군."
목소리의 주인은 붙잡은 칼날을 그대로 밀어냈다. 루아는 그 힘에 밀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보았다.
남자였다. 달빛을 흡수하는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인 조형미를 자랑했다. 날렵한 턱선과 오만한 콧날, 비현실적으로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한 잿빛 눈동자는 모든 빛을 빨아들여 어떤 감정도 비추지 않는 심연 그 자체였다. 그는 숲의 존재가 아닌, 고대의 대리석상이 밤의 장막을 찢고 걸어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발밑, 마른 나뭇잎 위로 하얀 서리가 엷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기가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
"누구냐."
루아는 단검을 고쳐 쥐며 낮게 물었다.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었지만,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도 실지 않았다. 두려움을 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 그것이 숲의 법칙이었다.
"나는... 이름이 많지."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루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에 잠시 머물렀다.
"어떤 이들은 나를 '고요한 절망'이라 부르고, 또 어떤 용들은 '심연의 메아리'라 칭하더군. 하지만 너는 편하게 '리안'이라 부르도록 해. 우리의 인연은 꽤 길어질 테니."
심연의 메아리.
발레리우스가 언급했던, 성소가 봉인하고 있던 끔찍한 존재. 루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성소의 붕괴가 결국 잠들어 있던 고대의 재앙을 깨우고 만 것이었다.
"자하르 왕자님은 어디에 있지? 당신이 끌고 간 건가?"
"끌고 갔다니. 무례하군, 엘라라의 아이. 나는 그저... 길 잃은 어린 용을 잠시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리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어떤 온기도 담고 있지 않아, 오히려 보는 이의 영혼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아주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어. 천 년 동안 억눌러왔던 분노, 슬픔, 그리고 고독. 그 모든 감정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어둠 속에서 말이지."
"헛소리 집어치워! 왕자님을 당장 돌려줘!"
루아는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정면이 아닌, 그의 사각을 파고드는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리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루아의 발밑 땅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허공에 몸이 뜬 그녀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역시 성급해. 그를 되찾고 싶다면, 힘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지."
리안은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진 루아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루아의 영혼을 꿰뚫는 듯 들여다보았다.
"걱정 마라. 나는 그를 해칠 생각이 없으니까. 오히려 나는 그를 '완성'시키고 싶어. 너의 그 순수한 사랑을 이용해서 말이야."
그의 속삭임은 독처럼 달콤하고, 저주처럼 섬뜩했다.
***
그 시각, 자하르는 완전한 무(無)의 공간에 떠 있었다.
소리도, 빛도, 감각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공허.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이것이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자신의 정신을 옭아맨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은 바닥났고,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영혼을 갉아먹는 침묵 속에서, 그의 의식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잠식당할 수는 없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썼다. 기억. 감각.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는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루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걱정하던 갈색 눈동자. 자신을 믿는다며 떨리던 목소리. 그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던 그녀의 작고 따뜻했던 손.
온기.
그 감각이 희미한 불씨처럼 그의 의식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 불씨를 키웠다. 그녀의 웃음소리,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의 냄새, 험한 산길을 거침없이 나아가던 단단한 뒷모습.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일한 등대가 되어주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그녀를... 루아를 지켜야 한다.’
그 의지가 절정으로 타오르던 순간, 주변의 어둠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바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목소리가.
『지켜? 네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자하르가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전의 폭주 상태와는 달랐다. 푸른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등에는 거대한 날개가 돋아나 있었으며, 황금빛 눈동자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파괴의 광기로 불타고 있었다. 완전한 용의 형상이었다.
『네놈은 파괴자일 뿐이야.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네 손으로 찢어발길 운명이지.』
"닥쳐라!"
자하르는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환영 속의 자신은 비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그의 발톱 아래, 불타는 마을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그 폐허의 한가운데, 루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배신감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너의 미래다. 네가 그녀 곁에 머물수록, 이 미래는 한시라도 빨리 현실이 될 뿐이야. 네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가장 끔찍한 저주다.』
"아니야... 아니야!"
부정하는 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환영 속의 용은 포효하며 루아를 향해 거대한 발을 내리찍었다. 자하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공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끔찍한 광경을, 그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심연의 메아리'가 영혼을 잠식하는 방식이었다.
***
자하르가 자신의 심연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리안은 여전히 루아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발버둥 치고 있겠지. 천 년의 고독보다 더 지독한 절망 속에서."
리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평온했다.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비평가 같았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루아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얼어붙었던 발목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예술가와 같아. 미완성된 걸작을 보면, 그것을 완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 아래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는 인간의 형태가 아닌, 기괴하게 뒤틀리고 꿈틀거리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자하르의 저주는 불완전해. 이졸데라는 어리석은 용은 그저 그를 고통 속에 가둬두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나는 그 저주의 진정한 가능성을 보았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분노와 증오를 극대화시켜, 이성과 본능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것. 그 끝에는 이 세상을 집어삼킬,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파괴의 화신이 탄생하게 될 거다."
광기 어린 말이었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완성이라는 건, 결국 왕자님을 미치광이 괴물로 만드는 것뿐이잖아!"
"관점의 차이지. 낡은 껍데기를 부수고 진정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과정일 뿐이야. 그리고 그 마지막 과정에는, 네가 반드시 필요하다."
리안이 천천히 루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창백하고 긴, 예술가의 손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엘라라의 아이. 내가 그를 만날 수 있게 해주지. 너의 존재를, 너의 목소리를, 너의 사랑을 그에게 똑똑히 보여줘라. 네가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희망은 가장 깊은 절망으로 변할 테고, 그 절망의 끝에서 그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루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이 그를 구원하는 열쇠가 아니라, 파멸로 이끄는 마지막 한 걸음이라고? 이졸데의 저주와 리안의 속삭임이 하나의 끔찍한 진실로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내가 왜 당신을 도와야 하지?"
"돕는 것이 아니다. 선택하는 것이지."
리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대로 그를 혼자 두면, 그는 결국 자신의 절망에 먹혀 소멸하게 될 거다. 어둠 속에서 영원히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망령이 되겠지. 하지만 네가 나와 함께한다면... 적어도 그는 '무언가'가 될 수 있어. 설령 그것이 네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그를 더 사랑하는 길일까?"
그것은 선택을 가장한 협박이자, 희망을 미끼로 던지는 잔인한 유혹이었다. 그를 이대로 잃을 것인가, 아니면 내 손으로 그를 괴물로 만들 것인가. 루아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 선택해라. 엘라라의 아이."
리안은 여전히 손을 내민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너의 사랑으로, 그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파멸시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