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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꺼졌다. 암흑 속에서 녹슨 금속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스미며,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두려움을 안겼다.
내 손목엔 여전히 희미한 빛을 내는 금속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빛은 푸르게 깜빡이며 심장을 두드리는 내 혈관을 타고 퍼졌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인식 코드, '두 번째 실험체'.
"네 이름이 뭐냐?"
짧고 명료한 질문이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겨울의 얼음장처럼. 처음으로 그들을 본 순간에도 이 질문이 날 반겼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내뱉었다. 아니, 사실 나도 모르게 더빙한 씁쓸한 웃음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죠?." 나는 되묻는다. 내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저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했다. "실험체에게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마치 그들의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관자놀이에 부풀어오른 핏줄이 맥박을 따라 떨리고 있었다. 답답한 무언가가 목젖을 타고 올라와 숨을 막는 듯했다. 이것은 자아 탐구의 시작일까, 아니면 끝일까.
그때, 멀리서 또 다른 소리,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사이렌 소리였다. 뭔가 남다른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숨이 급하게 차오르고, 온몸이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벽들이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가듯 휘몰아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과학자의 세계가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놈이 여기 있어!"
다급한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터졌다. 누군가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심장이 둥둥거리고,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긴장됐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길고 넓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맑은 불빛들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누군가와 부딪쳤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 새겨진 환영은 나와 닮아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그림자와 기억이 교차했다.
"너도 실험체야?" 내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튕겨 나왔다.
그는 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마치 경련하듯 떨렸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간절했다.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처럼.
"네가 원하는 것이 뭐든," 그는 속삭였다. "여기서 벗어나야 돼."
동시에 가슴 속에 숨겨졌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감정을 억누르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의 말은 위험했다. 실험실 밖은 위험한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실험실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 순간, 복도 저 끝에서 차가운 총기가 반사하는 빛이 내 눈에 박혔다. 무언가가 나를 향해 발사됐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자 총성이 울렸다. 공기가 찢겨질 듯한 소리를 내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나는 흐린 조명 속에서 눈빛을 맞춘 채 동반자가 되기로 했다. 각자의 손에 무기를 쥔 채 어둠 속을 달렸다. 환한 빛과 사이렌이 뒤엉켜 있는 아비규환 속을 헤치며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탈출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그것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 같은 위협이자 웃고 있는 마리오네트의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특정한 인자, 냉혹한 유전자 조작이 만든 자아는 우리를 비웃었다.
"누가, 너희에게 현실을 가르쳐준다고 했지?"
난 그 말을 듣고 손에 든 금속 막대기를 꽉 쥐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모든 것을 끝맺으리란 걸 직감했지만,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알았다. 내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그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 위에서 우린 서로를 버팀목 삼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복도 끝에 선연히 떠오르는 긴 그림자가 무언가 잔혹한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끝이면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지금, 정확히 이 순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밀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진정한 자유란 제약을 벗어난 자아를 찾는 것."
바로 그때,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실험체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손끝에서 떨리는 힘을 모았다. 다시 희미해지는 빛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몸을 웅크리고 결전의 시간대를 향해 발걸음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