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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커다란 금빛 촛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하고 뛰었다. 순간 고요하던 서재가 마치 살아난 듯한 소리로 가득 찼다. 한세아와 이은서, 두 정체성 사이에서 허둥대던 나는 황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침입하듯 내리쬐었다. 차갑지만, 어딘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그 빛 속에서 나는 자신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했다.
"세아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문밖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까지 긴장감으로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시녀는 내 질문이 무색해질 만큼 주저하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가늘게 숨을 죽이며 책상에 흩어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이제 곧 황제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각종 논란과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엔 왠지 모를 결단이 점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었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어둠 속에서 홀로 고요했던 서재와는 달리 밝게 불을 밝힌 복도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발자국 소리가 쿵쿵 울려 복도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도착한 연회장은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에서 독특한 향로의 향기가 뭉글하게 퍼져나가면서 호화롭게 꾸며진 부조물들이 덧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자칫 빈티가 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채워진 사람들의 실루엣이 그것을 완벽히 덮어주고 있었다.
황제가 가운데에 서 있었고, 태연한 미소와 함께 나를 보자 반가운 인사말을 건넸다.
"세아 공녀, 와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의 태연함이 내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내 안의 떨림을 가라앉혔다.
"폐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눈길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그가 머금던 미소 이면에 말못할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잠시 후, 황제는 손짓으로 나를 옆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있는 곳엔 그의 신뢰가 깃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신경은 왠지 모르게 팽팽하게 엉켜버렸다.
그렇게 얼마간 대화가 이어지던 중 갑작스레 라에르 공작이 등장했다. 그가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여전히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라에르 공작님. 반갑습니다."
황제는 공작을 향해 견고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공작은 한걸음 더 다가오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빛을 반사하는 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공녀님도 여기군요."
그의 인사는 간단했지만,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의도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미묘한 뉘앙스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모든 주변 소리들이 차츰 사라지고, 내 심장 소리만이 귀에 크게 울렸다.
공작이 한걸음 더 다가오며 은밀한 웃음을 날렸다. "공녀님, 저녁에 특별히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주저했으나, 그의 눈빛에서 단서조차 놓칠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근처의 작은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텅 빈 공간 속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켜켜이 쌓인 긴장감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공녀님, 그동안 황제를 믿는 선택을 했었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요?"
공작의 질문은 일종의 도발처럼 들렸다. 그의 미소는 무언가 음험한 기운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내가 직면하게 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른한 대낮처럼 밝지 않았다. 그 순간, 희미해지던 연회장의 소리들이 다시 한 번 아스라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낯선 상황 속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이 순간에 걸어 들어왔듯이, 그 어떤 판단이라도 막아설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공작은 마치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저 멀리서 폭발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놀람과 동요가 차츰 연회장을 뒤덮었다.
"공녀님!"
황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자마자, 나는 머리를 홱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 발밑에서 무언가가 움직였고, 나는 바닥에 휩쓸리듯 넘어졌다. 귓가에 소음이 울리고, 머릿속은 아득하게 비워졌다. 그저 혼돈 속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한줄기 빛처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와 라에르 공작이 처한 시간이 일렁이며 어딘가 기묘하게 혼돈으로 뒤섞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이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되돌아왔다. 내게는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따를 것이란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러 왔다.
폭발음이 연회장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잠시 동안의 고요 속에서 황제를 찾기 위해 엉켰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야 했다. 그와 함께할 수 있기를,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 모든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내 결정을 지켜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의문점들과 그 안에서 나갈 길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믿으며, 나는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