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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깊은 어둠 속, 내 방의 창문 너머로는 희미한 별빛만이 반짝였다. 카엘 경이 던진 마지막 말, ‘황녀 전하께서도 더 이상 슬픔에 잠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는 자꾸만 내 마음속을 파고들어 복수를 향한 나의 다짐을 흔들었다. 그가 내 과거의 비극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는 왜 이전 생에서 나를 배신했을까? 아니면 이것이 나를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술책일까? 의심과 혼란의 안개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 생에서 나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카엘 드 로안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지키는 것. 그의 모든 행동은 나에게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잊힌 마법사 가문’이라는 단서는 이전 생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정보였다. 그가 이 정보를 꺼낸 의도는 무엇일까? 정말로 제국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나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한 교묘한 계략일까? 나의 냉철한 판단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와의 동행을 받아들여야 했다.
릴리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새벽의 찬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내 마음속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전하, 요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혹시 밤새 잠을 설치신 건 아니신지요?”
릴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 릴리. 그저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렇단다. 제국의 평화는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니.”
릴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내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나는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정보를 얻기로 했다.
“릴리, 혹시 궁정 내에 ‘잊힌 마법사 가문’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 있니? 아주 오래전 제국을 위협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내 질문에 릴리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힌 마법사 가문이요?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오래된 기록에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릴리의 대답은 카엘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가 언급한 마법사 가문은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전 생에서 내가 놓쳤던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카엘 경과의 첫 공식적인 협력 작업을 위해 그가 머무는 서관의 작은 연구실로 향했다. 그곳은 일반적인 서재보다는 작았지만, 벽면 가득 책장이 들어차 있었고, 한쪽에는 복잡한 천체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미 탁자에 북부 지역 지도와 함께 여러 고문서들을 펼쳐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제와 같은 단단함과 함께 미묘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전하, 안녕하신지요. 오늘부터 우리는 제국의 가장 깊은 비밀을 파헤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도전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그에게 맞서기 위해 침착하게 맞섰다.
“카엘 경의 말씀대로, 그 비밀이 과연 제국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는 우리가 직접 밝혀내야겠죠.”
내 말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황녀 전하의 냉철함은 저를 언제나 놀라게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는 탁자 위의 지도를 펼쳤다. 그가 어제 고문서 보관소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한 지도였다.
“어제 제가 말씀드렸던 잊힌 마법사 가문, ‘레프니아’ 가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북부 변경의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힘을 다루는 고대 마법의 계승자였으나, 점차 어둠의 힘에 물들어 제국에 위협이 되었죠.”
나는 그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레프니아 가문. 이전 생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들이 지금의 북부 반란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묻자, 카엘은 고문서 더미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레프니아 가문의 마지막 기록 중 일부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붉은 달이 뜨는 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기록에는 북부의 일부 귀족 가문의 상징들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나는 양피지를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희미하게 그려진 상징들은 내가 황궁 서고에서 조사했던 북부 귀족 가문들의 문장과 일치하는 것도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북부 반란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고대의 마법 가문이 개입된 거대한 음모라는 뜻이 되겠군요.”
내 말에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무거웠다.
“맞습니다. 제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단순한 귀족들의 동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레프니아 가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신 로안 가문과의 유착 관계 또한, 사실은 레프니아 가문이 로안 가문을 이용하려 했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로안 가문이 이 반란의 주역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당하려 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의 논리는 그럴듯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이전 생에서 그가 제국을 파괴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럼, 카엘 경은 레프니아 가문의 잔당들이 북부 반란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들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묻자, 카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제국의 붕괴,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 아마도 그들이 숭배했던 어둠의 마법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강력한 힘을 가졌었고, 그 힘을 다시 되찾으려 할 겁니다.”
그의 말은 이전 생에서 카엘이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던 방식과 묘하게 겹쳤다. 나는 그를 다시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완벽한 변명인가? 아니면 그가 진심으로 제국을 지키려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요? 그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카엘은 망설임 없이 탁자 위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레프니아 가문의 기록에는 ‘붉은 달’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특정 시기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들의 은밀한 아지트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붉은 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고문서 더미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 표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제가 로안 가문의 오래된 서고에서 찾아낸 책입니다. 레프니아 가문이 사용했던 고대 상형문자가 기록되어 있죠. 저는 이 책을 해독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혹시 이 문양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는 책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책 표지의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선들과 기하학적인 도형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장식 같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이전 생에서 나는 이런 고대 마법이나 상형문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기억은 정치적 음모와 인물 관계에 대한 것이었지, 이런 고대 지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미래의 기억이 직접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어도, 단서가 될 수는 있었다. 북부 반란이 시작될 무렵, 어떤 귀족 가문들이 특히 활발하게 움직였는지, 그들의 행동 양식이 어떠했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이 문양…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북부의 특정 가문들이 사용하는 장신구에서 비슷한 형태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카엘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즉시 펜을 들어 지도에 표시를 해 나갔다.
“정말입니까? 어느 가문입니까, 황녀 전하?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습니다.”
“레프니아 가문과의 유착 관계를 조사하던 중, 저는 북부의 ‘벨라스 가문’이 사용하는 문장 일부가 이 문양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전 생에서 가장 먼저 반란에 동조했던 가문 중 하나입니다.”
내 말을 듣자, 카엘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미세한 동요.
“벨라스 가문이라… 저도 그들의 행적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안 가문과 오래전부터 친밀한 관계였지만, 제국의 명령에 불복종한 적도 있습니다. 황녀 전하의 기억과 저의 조사가 일치하는군요. 벨라스 가문이 레프니아 가문의 잔당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벨라스 가문과의 관계를 언급하며 자신의 가문에 대한 의심을 또다시 비켜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내가 놓치지 못할 작은 균열이 보였다. 그의 눈빛 속에 잠시 스쳐 지나간 고뇌와 망설임. 마치 벨라스 가문과의 관계가 그에게 어떤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벨라스 가문의 동향을 더 깊이 파헤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붉은 달과 연관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알 수 없었지만, 그 속에는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듯한 열의가 엿보였다.
“동감합니다, 황녀 전하. 벨라스 가문은 이 모든 퍼즐의 중요한 조각이 될 것입니다. 이 고대 상형문자 해독을 마치는 대로, 제가 직접 벨라스 가문을 찾아가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나에게 또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감시. 그가 벨라스 가문을 찾아갔을 때, 그의 진짜 의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나의 복수를 위한 기회로 삼아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카엘 경. 저는 제 방식대로 벨라스 가문을 감시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경도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진실이 아닐 때가 더 많으니까요.”
내 말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협력의 미소인지, 아니면 나를 비웃는 미소인지.
“명심하겠습니다, 황녀 전하. 황녀 전하의 현명함은 저에게 늘 큰 깨달음을 줍니다.”
그의 칭찬은 진심처럼 들렸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몇 시간 더 고문서와 지도를 검토하며 추가적인 단서를 찾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집중력을 보여주었고, 그의 논리적인 추론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내 안의 복수심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지략과 헌신적인 태도는 부정할 수 없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카엘은 마지막으로 고문서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황녀 전하, 이 기록은 레프니아 가문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해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시 황녀 전하의 통찰력으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그는 나의 ‘통찰력’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내가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정말로 눈치챈 것일까? 나는 기록을 받아들었다. 고대어로 쓰인 난해한 문장들 사이로, 나는 익숙한 듯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레나’. 내 이름이었다.
내 이름이 고문서 속에서 나오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카엘은 나의 미세한 동요를 놓치지 않는 듯, 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알 수 없었지만, 그 속에는 내가 감히 읽어낼 수 없는 비밀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 고문서는 대체 무엇일까? 왜 내 이름이 이곳에 있는 걸까?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연구실을 나서며,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의 진정한 얼굴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현재,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발견한 ‘레나’라는 이름. 이 모든 것이 나를 알 수 없는 미궁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의 복수는 과연 이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위험한 동행의 끝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그의 눈빛 속에 갇힌 나의 이름은, 복수를 향한 나의 칼날을 시험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