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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지난밤 카엘 경이 던진 말, ‘황녀 전하의 통찰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다음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는 계속해서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흔적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의 ‘어른스러운’ 언행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까? 어떤 쪽이든, 그는 이전 생의 카엘과는 확연히 달랐다. 복수를 다짐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릴리가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전하, 오늘 아침은 가볍게 준비했습니다. 카엘 경과의 회의는 잘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준비는 완벽해. 하지만 이번 회의는 단순한 정보 공유가 아닐 거야. 그는 분명 나를 시험하려 들겠지."
릴리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요즘 많이 달라지셨다는 이야기가 궁정 내에 파다합니다. 모두 전하의 현명함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감탄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제국을 지킬 수 있는 대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것뿐. 그 과정에서 카엘은 가장 큰 걸림돌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변수였다. 그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회색빛 여명이 서서히 물러나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카엘 경과의 회의를 위해 황궁의 고문서 보관소로 향했다. 그곳은 일반적인 서재와는 달리,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제국의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신성한 장소였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이 코를 찔렀다. 카엘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등불 아래에서 고문서를 펼쳐 들고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짙은 남색 제복은 차분하면서도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지난번처럼 노골적인 경계심보다는 묘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황녀 전하, 일찍 오셨군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익숙하신 분 같습니다."
그의 비유적인 표현에 나는 속으로 긴장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카엘 경이야말로 제국 곳곳의 어둠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으시겠죠. 저는 그저 빛을 쫓는 데 익숙할 뿐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뒤지지 않으려 차분하게 응수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탁자 위에 북부 지역 지도를 펼쳤다.
"북부 반란은 단순한 불만이 아닙니다. 일부 귀족들의 선동이 분명하지만, 그 뒤에는 제국을 뒤흔들려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카엘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특정 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강력했다.
"저는 로안 가문이 오랜 시간 북부 변경을 지켜왔기에, 북부 귀족들의 동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신 유착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스스로 ‘유착 관계’라는 단어를 꺼냈다. 이것은 경계해야 할 신호였다. 그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떠보고 있었다.
"어떤 유착 관계를 말씀하시는 거죠, 카엘 경?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표면에 드러난 사실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져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다. 카엘은 잠시 고문서를 뒤적거리더니, 한 장의 낡은 지도를 꺼내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이것은 로안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북부 변경의 고지도입니다. 일반적인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작은 영지들과 잊힌 가문들의 흔적이 남아 있죠."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곳, 지금은 폐허가 된 작은 영지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마법사 가문이 대대로 다스렸던 곳이죠. 겉으로는 평범한 가문이었지만, 이들은 어둠의 마법과 연관이 깊었고, 한때 제국에 큰 위협이 될 뻔했습니다. 로안 가문이 이들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이 가문의 일부가 북부 귀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설명은 자세하고 설득력 있었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지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이전 생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아는 것은 카엘이 이 반란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그 뒤에 더 복잡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시사했다.
"그럼, 카엘 경은 이 잊힌 마법사 가문의 잔당들이 북부 반란의 배후에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내가 묻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단순히 잔당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을 탐내는 자들이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죠. 황녀 전하께서는 이 가문들의 명단 중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그들이 이 마법사 가문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신 것입니까?"
그의 질문은 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나는 그가 나의 '통찰력'을 칭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단순히 문서를 검토한 것 이상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전 생의 기억을 토대로 어렴풋한 연관성만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마법사 가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자, 나는 더 깊은 혼란에 빠졌다.
"아직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찾은 기록에는 그들이 로안 가문과의 관계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카엘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지도 위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로안 가문이 북부 귀족들과 오랜 교류를 이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그것은 로안 가문을 이용하려 한 불순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의심을 단호히 부정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이 또한 그의 교묘한 연극일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때,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카엘 경. 황태자 전하께서 두 분을 동궁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황태자의 호출에 고문서 보관소를 나섰다.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나는 카엘에게 물었다.
"카엘 경은 제국의 평화를 위해 싸우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 싸움의 끝에서 경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질문에 카엘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하늘처럼 깊었고, 나는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음을 느꼈다.
"제가 바라는 것이요? 저는 그저… 제국이 더 이상 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도 더 이상 슬픔에 잠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더 이상 슬픔에 잠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그가 내 과거의 비극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전 생에서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는 왜 이전 생에서 나를 배신했을까? 아니면 이것이 나를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술책일까?
동궁 서재에 도착했을 때, 황태자 오라버니는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레나, 카엘 경. 북부의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반란 세력이 예상보다 조직적이고, 심지어 외부 세력과의 연계도 의심됩니다."
오라버니의 말에 카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제가 고문서 보관소에서 잊힌 마법사 가문에 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들이 북부 반란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그 가문과 연관된 귀족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셨습니다."
카엘은 나의 발언까지 함께 언급하며 황태자에게 보고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우리 둘이 하나의 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했다. 황태자 오라버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 가문이라니? 레나, 정말 그런 단서가 있었느냐?"
나는 오라버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 카엘 경의 말씀대로, 오래된 기록에서 잊힌 마법사 가문과 관련된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들이 북부 귀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오라버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구나. 카엘 경, 황녀와 함께 이 마법사 가문의 잔당들을 추적하고,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도록 하게.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제국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황녀 전하와 함께 반드시 진실을 파헤치겠습니다."
카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제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진정한 충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에게서 여전히 내가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을 느꼈다.
서재를 나서며, 카엘은 나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전하, 이제부터 우리는 더욱 긴밀히 협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신뢰를 호소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이것이 그가 내 심장을 다시 한번 꿰뚫기 위한 완벽한 거짓말일까? 그의 눈빛에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안개 속을 걷는 듯한 혼란스러움이 감돌았다. 복수를 다짐했던 나의 칼날은 여전히 예리했지만, 그 칼날이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나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위험한 동행의 끝에서, 나는 과연 그의 진정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얼굴이 내가 아는 것과 너무 다르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둠이 다시 황궁을 덮기 시작했고, 나의 마음속 혼란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