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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찢는 굉음이 세상을 삼켰다.
순간,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무너져 내리는 벽의 돌멩이 하나하나가 눈에 보였다. 자욱한 먼지가 붉은 핏물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벽난로의 불길이 폭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비명과 고함,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엉켜 지옥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하지만 내 몸은 그 모든 혼돈보다 빨랐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5년간 전장을 구르며 뼛속까지 새겨진 생존 본능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폭발의 충격파가 닿기 직전 몸을 낮추고, 옆으로 구르며 이안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 역시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지만, 내 움직임은 그보다 반 박자 빨랐다. 우리는 육중한 참나무 책상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로 파편 섞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고,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바닥에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비수처럼 박혔다.
“크윽…!”
옆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태자 아서였다. 그의 강철 갑옷도 모든 파편을 막아주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어깨 갑옷 틈새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씹어 삼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혼란이 아니라, 침입자를 향한 살의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적의 위치를 파악해! 방어 진형을 구축하라!”
레오를 비롯한 진홍의 사자단 기사들이 아서를 감싸며 방패 벽을 만들었다. 무너진 벽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유령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숲에서 마주쳤던 자객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치명적이었다.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오직 살육만을 위한 인간 병기들이었다.
“젠장…!”
나는 낮게 욕설을 뱉었다. 저놈들은 명백히 나를 노리고 왔다. 내가 황태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성벽을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의 화력을 동원했다. 이 도시에서 내 동선을 아는 자는 극소수. 황태자의 첩보망이 뚫렸거나, 혹은…. 내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는 언제 표정을 바꿨는지, 서늘한 눈으로 전장을 훑으며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이안이 내 손목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폭발이 일어난 벽의 반대편,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을 향하고 있었다.
“저 너머는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주 놈들이 비상시에 도망치려고 만들어 둔 쥐구멍이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모든 성에는 쥐구멍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나를 이끌었다. 진홍의 사자단과 검은 복면의 암살자들이 뒤엉켜 피 튀기는 난전을 벌이는 사이, 우리는 방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강철이 부딪히는 소음과 비명,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가 우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어딜 가느냐!”
아서의 고함이 등 뒤에 날아와 박혔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분노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과, 정체불명의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을 빼돌리려는 발레리우스의 첩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 끝을 비틀어 비웃어 보였다. 마치 ‘이게 바로 오라버니가 다스리는 제국의 현실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안이 태피스트리를 찢듯 걷어냈다. 그의 예측대로, 그 뒤에는 낡은 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품속에서 꺼낸 작은 쇠꼬챙이로 망설임 없이 자물쇠를 후벼팠다. 단 몇 초 만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낡은 자물쇠가 풀렸다.
우리가 어두운 통로 안으로 몸을 던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방 안을 돌아보았다. 레오 기사가 암살자의 칼을 막아서다 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나를, 그의 옛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원망도, 배신감도 아닌, 오직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가슴에 작은 가시처럼 박혔다.
나는 가시를 억지로 뽑아내듯 고개를 돌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전, 아서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카일루스!”
그것은 5년 만에 처음으로, 그가 나를 부른 진짜 내 이름이었다.
***
곰팡내와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밀 통로는 성의 지하 수로로 이어져 있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물과 사방에서 기어 다니는 정체 모를 벌레들의 감촉이 소름 끼쳤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말없이 어둠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전투의 소음이 점차 멀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안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안전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좁은 수로 안에서 낮게 울렸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자, 긴장이 풀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서야 왼쪽 팔에 전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찢어진 소매 아래로 시뻘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 책상 뒤로 몸을 피할 때 날아온 파편에 긁힌 모양이었다.
“상처가….”
이안이 내 팔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겉옷 안쪽을 찢어내 내 팔에 감아주려 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필요 없어. 이 정도는 긁힌 축에도 못 들어.”
“고집부리지 마시죠. 이 더러운 물속에서 파상풍이라도 걸릴 생각입니까?”
그는 내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붙잡아 억지로 천을 감았다. 그의 손은 놀라울 정도로 단단하고 뜨거웠다. 피 냄새와 곰팡내 사이로, 그의 체취가 희미하게 끼쳐왔다. 이상하게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 윤곽을 노려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상처를 묶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우리의 위치가 발각됐어. 그것도 황태자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그곳에 있을 줄 알고 성벽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처럼.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그렇겠죠.”
이안은 붕대 매듭을 단단히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황태자의 첩보망이 뚫렸거나, 혹은 우리 주변에 쥐새끼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네놈은 아니겠지?”
내 날카로운 질문에, 그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받아 기이하게 빛났다.
“제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암살은 조용하고 은밀할수록 좋은 법입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가 범인이라면, 진작에 나를 처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황태자 측의 정보가 샌 것이다. 레오 기사, 아니면 그에게 보고를 받은 누군가. 혹은 아서의 최측근 중에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제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이제 어쩔 거지?”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수도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혔을 테니, 당분간은 숨을 곳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이 도시에 마련해 둔 안전가옥이 있습니다.”
그의 준비성은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로의 끝에서, 우리는 낡은 쇠창살을 뜯어내고 도시의 가장 후미진 빈민가 골목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공기는 차고 축축했다. 우리는 빗물로 대충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인적 없는 뒷골목을 따라 움직였다.
이안의 안전가옥은 겉보기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폐가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외로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 나타났다. 최소한의 가구와 비상식량,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선포될 겁니다. 꼼짝없이 갇힌 셈이죠.”
이안이 마른 옷을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옷을 받아 들고 방구석에서 몸을 돌려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젖은 옷을 벗자 팔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렸다.
“이리 줘 보십시오. 소독이라도 해야지.”
그가 작은 약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거친 천 조각을 걷어내자, 생각보다 깊게 팬 상처가 드러났다. 그는 작은 병에 담긴 독한 소독약을 상처 위에 쏟아부었다.
“흐읍…!”
살갗을 태우는 듯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안은 내 어깨를 가볍게 눌러주며, 능숙한 솜씨로 상처를 소독하고 새 붕대를 감았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조금도 숨겨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검을 쥐는 것만큼이나 상처를 돌보는 데에도 익숙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붕대를 다 감고 나서도 그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상처 주변의 여린 살갗을 무심코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빗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시의 소란, 그리고 우리 둘의 숨소리만이 좁은 공간을 채웠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는 감히 읽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그 순간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문득 내 팔 아래,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내 젖은 옷의 소매 끝에 꽂혔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건…?”
그는 내 팔을 놓고, 내 옷소매에 박혀 있는 작고 검은 물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것은 길이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독침이었다. 아마 성에서 탈출할 때, 암살자 중 하나가 쏜 것이 옷에 박힌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조금만 빗나갔다면 지금쯤 나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놈들이 남긴 기념품인가 보군.”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독침을 촛불 아래로 가져가 유심히 살폈다. 독침의 끝부분에는 아주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초승달을 물고 있는 뱀.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문양….”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은팔찌. 숲에서 죽인 자객의 몸에 있던 그 표식.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독침에 새겨진 문양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그리고 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은 모두 같은 배후를 가지고 있었다.
“역시… 그놈들이었어.”
내 목소리가 증오로 잠겨 나왔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이 표식을 따라가 놈들의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분노로 온몸이 떨려올 때였다.
독침을 살피던 이안이 나지막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공허했다.
“초승달과 뱀… 그리고 이 독의 색깔. 설마….”
그는 독침의 끝에 묻은 검푸른 독액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잊었던 악몽을 다시 마주한 사람처럼.
“왜 그러지? 아는 독인가?”
내 질문에,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다음 말은, 성벽을 무너뜨렸던 폭발보다도 더 큰 충격이 되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이 독은… 황후 폐하께만 쓰인 게 아닙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독침을 쥔 채, 얼어붙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5년 전, 제 아버지를 암살한 독과… 똑같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