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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제 아버지를 암살한 독과… 똑같은 겁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 한마디에 집어삼켜졌다. 빗소리도, 바람 소리도, 내 심장이 세차게 울리는 소리마저도 이안의 공허한 목소리 앞에선 의미를 잃었다. 시간은 얼어붙었고, 공간은 촛불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독침과 그의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지옥을 들여다보는 나, 단 세 점으로 압축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암살한 독. 발레리우스 대공. 제국 북부를 지키는 ‘겨울의 방패’라 불리며 황제와는 다른 의미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남자. 그의 죽음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제국 전체에 그렇게 공표되었었다.
또 하나의 거짓. 또 하나의 기만.
“……증명해.”
내 목소리는 쇳가루가 섞인 것처럼 거칠었다. 감정에 휘둘릴 여유 따윈 없었다. 동정은 사치였고, 공감은 약점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여전히 나를 자신의 장기 말로 쓰려는 투자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고통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이 내 복수의 판 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냉정하게 계산해야만 했다.
이안은 내 의심 가득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독침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보인 균열이었다.
“제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의 서재에는 저와 단둘이 있었죠. 아버지는 북부 국경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기밀 보고서를 읽고 계셨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건강하셨죠.”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용암 같은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신을 읽던 중, 종이에 손가락을 베였습니다. 아주 작은 상처였죠.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에 검푸른 반점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황실 최고의 의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아버지는 제 품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딱 한마디였죠. ‘뱀을 조심해라’.”
뱀. 초승달을 물고 있는 뱀. 소름 끼치는 우연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2황후 레안드라는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부검을 막았고, 모든 증거를 인멸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빼돌린 증거는 아버지가 읽던 보고서의 한 귀퉁이, 그 독이 묻어있던 종잇조각뿐이었죠. 5년간 대륙의 모든 독 전문가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도 그 독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 덕분에 그 독의 출처를 알게 됐군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투자자의 계산적인 빛이 아니었다. 같은 지옥을 공유한 생존자의 동질감, 혹은 그보다 더 지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황후 폐하와 발레리우스 대공. 5년 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2황후를 견제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불과 몇 달 간격으로 ‘자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자식인 우리 둘 앞에, 똑같은 독사의 이빨이 드러났죠. 이래도 증명이 더 필요하십니까, 그림자 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것은 더 이상 그가 짜놓은 판이 아니었다. 우리 둘 다, 이름 모를 거대한 손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고통을 동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해했다. 뼈에 사무치는 그 증오의 깊이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적은 같았다. 목표 역시.
“좋아. 이제 우린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의 상처에서 오는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공동의 적을 둔, 일시적인 동맹이다. 내 복수가 끝나는 순간, 이 동맹도 끝이야. 명심해둬.”
내 선언에, 이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전의 여유로운 미소가 아닌, 날카로운 칼날 같은 미소였다.
“제 복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황녀 전하.”
그가 처음으로 나를 ‘황녀’라 불렀다. 그것은 더 이상 비꼼이나 시험이 아닌, 우리의 새로운 관계를 정의하는 인장이었다.
***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우리의 짧은 동맹 선언 이후 찾아온 어색한 침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안은 촛불 아래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살피고 있었고, 나는 창문 틈으로 경계 태세에 들어간 도시의 움직임을 살폈다. 진홍의 사자단 깃발을 든 순찰조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새 한 마리 빠져나가기 힘든 철통 경비였다.
“수도로 가야 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독과 문양. ‘마담 엘라라’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제국의 모든 비밀을 거래한다는 여자의 정보망에, 이런 표식이 걸리지 않았을 리가 없어.”
“동감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황태자는 이 도시 전체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우리를 찾아낼 겁니다. 성벽이 공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하고, 무엇보다… 돌아온 동생을 다시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아까 전 아서의 마지막 절규가 귓가에 맴돌았다. ‘카일루스!’.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그렇다고 여기서 썩고 있을 순 없어. 놈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 반드시 다시 공격해 올 거야. 이 좁은 폐가 안에서 다음 공격을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물론입니다. 그래서 길을 찾고 있습니다. 쥐새끼들만 아는 길 말입니다.”
이안이 지도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시의 하수 처리장과 연결된, 지도에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이곳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 도시의 모든 오물을 처리하는 하수도 관리인이죠. 동시에, 세렌디아의 모든 밀수품이 그의 손을 거쳐 들어오고 나갑니다. 황태자의 기사들이 시궁창까지 뒤질 거라 생각하진 않겠죠.”
“확실한가?”
“그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념으로 움직이죠. 발레리우스 가문에 큰 빚을 진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낡은 침대에 걸터앉아 허벅지에 묶어두었던 단검을 고쳐 맸다. 이안은 남은 식량을 꾸리고, 만약을 대비해 작은 연막탄 몇 개를 챙겼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지만, 서로의 움직임만으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기묘한 신뢰가 싹트고 있었다. 증오라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독버섯 같은 신뢰였다.
“순찰조가 교대하는 시간은 자정. 그때가 유일한 기회입니다. 10분.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합니다.”
이안의 눈이 촛불에 비쳐 번뜩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때의 고통은 사라져 있었다. 다시 예리하고 냉철한 전략가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의 가면 아래, 모든 것을 불태울 준비가 된 복수심이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역시 내 눈에서 같은 불꽃을 보았을 것이다.
***
자정. 빗줄기가 조금 잦아든 틈을 타, 우리는 폐가를 나섰다. 어둠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지붕과 지붕 사이를 소리 없이 넘나들며, 짐승처럼 몸을 낮추고 도시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좁은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대화 소리와 횃불의 그림자가 심장을 옥죄었다. 숨을 죽이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몇 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약속 장소인 낡은 제혁소 뒤편에 먼저 도착해 주변을 살폈다. 내가 뒤따라 도착하자,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곧, 어둠 속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작은 등불이 나타났다. 구부정한 허리에 얼굴 가득 주름이 잡힌 노인이었다. 퀴퀴한 하수구 냄새와 독한 술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늦으셨구려, 도련님.”
노인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안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사정이 좀 생겼습니다, 마사 영감. 부탁했던 건 준비됐습니까?”
“내 이름 걸고 하는 일에 실수는 없는 법이지. 저쪽 마차요. 밑바닥은 비워뒀으니, 냄새나는 가죽 더미 아래 숨으면 될 거요. 동쪽 성문을 통과하면, 강가에 작은 배를 준비해 뒀으니, 그걸 타고 하류로 내려가시오.”
노인은 손가락으로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짐마차를 가리켰다. 마부 자리에는 덩치 큰 사내가 잠든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안이 노인에게 작은 가죽 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노인은 주머니를 받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은혜는 이미 20년 전에 다 갚았소. 선대 대공 각하께서 아니었다면, 내 새끼들은 길바닥에서 굶어 죽었을 게요. 부디… 그분의 원한을 갚아주시구려.”
노인은 슬픔이 담긴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고는, 어둠 속으로 기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들의 짧은 대화를 들으며, 내가 모르는 이안의, 그리고 발레리우스 가문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단순한 권모술수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아는 자였다.
“서두르시죠.”
이안이 먼저 마차로 다가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마부와 짧게 눈인사를 나눈 이안이 마차의 뒷문을 열었다. 역한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안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기 서.”
어둠을 가르고 날아온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나타난 인영은 하나가 아니었다. 횃불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자, 진홍의 사자단 기사 대여섯 명이 골목의 양쪽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서, 뽑아 든 검 끝을 우리에게 겨누고 서 있는 인물은….
레오 기사였다. 팔에는 어젯밤 입었던 상처 때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의 올곧은 눈동자는 배신감과 실망, 그리고 깊은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나를, 한때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이 길은 황태자도 모르는 길이어야 했다.
레오는 우리의 질문에 대답 대신, 비에 젖은 얼굴로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돌아오셨는지도.”
그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는 나를 시험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당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는 검을 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뒤에 선 기사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당신을 막아서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정말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자격이 있는 분인지, 아니면 그저 복수심에 눈이 먼 또 다른 재앙일 뿐인지. 제 검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