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피소드는 오디오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귀를 찢던 굉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시야를 가득 채웠던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 잿빛 침묵이 폐부 깊숙이 내려앉았다. 타버린 마력의 매캐한 냄새와 부서진 돌가루가 공기 중에 자욱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아니,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영혼의 형태로 튕겨 나온 나는, 그저 이 모든 풍경을 지켜보는 관망자일 뿐이었으니까.
“……릴리아.”
폐허가 된 옥좌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진 대지를 기어가듯 흘러나왔다. 카엘이었다. 그는 엉망으로 부서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텅 빈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그의 영혼을 밀쳐내기 전까지 우리가 함께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잿빛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세상의 모든 빛을 거부하는 심연처럼 공허했다. 그를 짓누르던 얼음 감옥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끔찍한 절망이 그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다. 내가 원했던 대로. 하지만 그의 영혼은, 나와 함께 산산조각 나 버린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탑의 천장은 거대하게 뚫려 있었고, 그 구멍 너머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밤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끝나버렸다.
“릴리아….”
그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부름이 아니었다. 찢겨 나간 자신의 일부를 찾는, 길 잃은 짐승의 서러운 울음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잡을 수 없는 내 잔상을, 느낄 수 없는 내 온기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 무력한 손짓이, 이미 소멸한 내 심장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았다.
그때였다.
홀의 중앙, 마리아가 자신을 던져 제물이 되었던 제단 위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길한 푸른빛을 토해내던 ‘세상의 눈물’은 그 빛을 모두 잃고, 투명한 수정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정의 심장부에서, 아주 작고 연약한 빛 하나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소멸하기 직전 보았던, 초대 황제의 순수한 기억이 담긴 푸른 씨앗이었다.
내가 일으킨 대폭발은 저주받은 시스템 전체를 파괴했지만, 이 작은 씨앗 하나만은 소멸시키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나의 ‘소멸’이라는 힘이 다른 모든 오염된 데이터를 지워버림으로써, 이 순수한 씨앗이 다시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씨앗의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것은 주변의 마력 입자들을 끌어당기며, 무언가의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카엘 역시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 아주 오랜만에 희미한 ‘희망’이라는 색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빛이 하나의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긴 은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새벽빛을 머금은 파란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것은 나, 릴리아였다.
나는 맨발로, 빛의 파편으로 엮은 드레스를 입은 채, 투명한 수정 제단 위에 서 있었다. 내 몸을 휘감던 공허의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온몸에 따스하고 맑은 에너지가 샘물처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저주를 파괴하는 ‘독’이 아니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시스템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꿈인가.”
카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삭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제단에서 내려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 발이 닿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희미한 푸른빛의 꽃잎들이 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끊어졌던 우리의 연결이 다시 희미하게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영혼에 각인된 지독한 상실감과 고통이, 내게로 흘러 들어왔다.
마침내 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먼지와 피로 얼룩진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였다.
“꿈이 아니야, 카엘.”
내 목소리가 나오자,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마치 신기루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겹쳤다.
“정말… 당신이오?”
“그래, 나야.”
그 순간, 그의 무너진 둑에서 뜨거운 것이 터져 나왔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그 위에 자신의 이마를 기댄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왕족의 긍지도, 북부 늑대의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되찾은 한 남자로서 흐느꼈다. 그 뜨거운 눈물이 내 손등을 적셨다. 나는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이오. 내 영혼은 분명 당신의 소멸을 느꼈는데.”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시스템을 파괴한 게 아니었어. 포맷하고, 새로운 운영체제를 설치한 것에 가까워. 알렉시스의 저주라는 악성코드를 내 ‘독’으로 완전히 삭제하고, 초대 황제가 남긴 순수한 기억의 씨앗으로 시스템을 재부팅한 거지.”
“재부팅…?”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그 새로운 시스템의 관리자가… 내가 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 탑의 죄수나 제물이 아니야. 나는 이 정원의 새로운 주인이자, 정원사야. 이곳에 갇힌 모든 영혼들을 해방시키고, 이 땅을 다시 정화하는 것이 나의 새로운 역할이 된 거지.”
그는 내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은 듯했다. 내가 더 이상 희생하거나 소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나를 단단히 부축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게. 마치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는… 다시는 그런 선택을 혼자 하지 마시오.”
내 귓가에, 그의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
“약속해. 어떤 지옥이 펼쳐지더라도, 내 손을 놓고 먼저 뛰어들지 않겠다고.”
나는 그의 단단한 등에 팔을 둘러, 그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할게.”
***
그로부터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제국은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저주의 근원이 사라지자, 그 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던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몰락했다. 황실의 피에 섞여 있던 독기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총명함과 활기를 되찾았다. 물론 혼란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건강한 진통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반역자 알렉시스를 봉인하고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아버지인 황제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나 먼 영지로 떠났다. 그는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늙고 지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과오가 만든 역사의 흐름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나는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새로운 여제가 되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언제나처럼 카엘이 황제 배우자로서 든든하게 서 있었다. 그는 북부의 자치권을 되찾았고, 멸망했던 부족의 생존자들을 모아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그는 더 이상 복수심에 불타는 늑대가 아니었다. 그는 상처를 보듬고 미래를 개척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폐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충성스러운 백작, 에드윈이 정원 입구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일 년간의 고생이 역력했지만, 그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쳤다.
“고마워요, 백작. 잠시만 더 시간을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폐하.”
에드윈은 조용히 물러났다. 나는 카엘과 함께,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황궁의 중앙 정원을 거닐었다. 한때 ‘정원의 저주’라 불리며 모두가 기피하던 이곳은, 이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저주의 근원이었던 탑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거대한 백수정이 박힌 맑은 호수가 생겨났다.
나는 호숫가에 서서, 내 모습을 비추는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는 내 얼굴과 함께, 맑고 푸른 하늘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서럽게 울지 않는, 평화로운 하늘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내 옆에 선 카엘이, 내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직은 쌀쌀한 초봄의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첫 번째 삶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때의 나는, 이 썩어가는 정원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발버둥 쳤지. 꽃은 시들고 나무는 죽어가는데, 그저 울타리만 튼튼하게 세우면 괜찮을 거라고 믿었어.”
“…….”
“하지만 틀렸었어. 진정으로 정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썩은 뿌리를 모두 도려내고, 오염된 땅을 전부 갈아엎은 뒤,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만 했던 거야. 파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됐던 거지.”
나의 두 번째 삶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괴를 위한 것이었고, 그 파괴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카엘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검술로 다져진 단단한 손이었지만, 그 온기는 더없이 따뜻했다.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소.”
그가 말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지.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가꾸어 나갈 이 정원은, 그 어떤 겨울에도 다시는 시들지 않을 것이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회색 눈동자 속에, 온전히 나만을 담고 있는 깊은 신뢰와 애정이 보였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순간, 정원 저편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망울이 수줍게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길고 길었던 제국의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나의 두 번째 삶은, 비로소 이곳에서 진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