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피소드는 오디오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검붉은 번개가 내 영혼을 꿰뚫는 감각은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던 모든 기억과 감정을 강제로 지워나가는, 차가운 소거(消去)의 과정이었다. 회귀 전의 비참했던 삶, 이번 생의 처절했던 복수, 그리고 카엘을 향해 멋대로 피어났던 이름 모를 감정들까지. 내 모든 것이 흐릿한 잉크처럼 번져나가며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껍데기만 남은 채, 알렉시스의 일부가 되어버릴 터였다.
「크윽…!」
우리의 영혼을 연결하는 끈을 타고, 카엘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를 짓누르는 얼음 파도는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죄책감과 실패의 기억을 얼려 만든, 영원히 녹지 않는 빙하였다. 그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가는 소리가 내 정신을 어지럽혔다. 우리는 함께 묶인 채, 각기 다른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보아라!”
하늘에서, 신이 된 광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너희가 선택한 유대라는 것의 끝이다! 서로의 고통을 생생히 느끼며, 서로가 파괴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인 가장 잔인한 형벌! 애초에 너희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너희는 태생부터 서로를 파괴해야만 하는 운명이었으니까!”
알렉시스는 우리의 절망을 양분 삼아 더욱 거대해지는 것 같았다. 얼어붙은 호수 전체가 그의 의지에 따라 꿈틀거렸다.
“자, 다시 한번 선택해라, 릴리아! 네 안의 나와 같은 힘을 받아들여, 저 무력한 늑대를 버리고 내 옆에 서라. 너의 그 하찮은 복수심 따위, 이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쾌감에 비하면 먼지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해주겠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 안의 ‘독’은 그의 저주에서 비롯된 힘. 어머니는 적의 심장에서 칼을 뽑아 내 손에 쥐여준 셈이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를수록, 내 영혼 또한 칼의 근원에게 잠식당한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 잔인한 함정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를 깨물었다. 흩어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저 미치광이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기 위해 두 번째 삶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방법. 다른 길이 있어야만 했다.
에레보스가 말했던 제3의 길. 어머니가 걸으려 했던 길.
나는 알렉시스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논리에는 분명 허점이 있을 터였다. 광기에 잠식된 자의 오만함 속에는, 언제나 치명적인 사각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네 어미는 나의 힘을 훔쳐 네 영혼에 심어놓은 것뿐이야.’
‘네가 그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너는 나에게 더욱더 가까워지게 되는 거지.’
가까워진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흡수된다? 동화된다? 아니면… 대등해진다?
순간, 벼락 같은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어머니. 당신은 그저 힘을 훔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어.
어머니는 연금술사였다. 납으로 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독을 정제하여 약을 만드는 데에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사람. 그녀는 알렉시스의 광기 어린 저주라는 ‘원독(原毒)’에서, 불순물을 모두 걸러내고 오직 ‘파괴’라는 본질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 영혼에 심었다.
알렉시스의 힘은 무차별적인 ‘오염’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지배하고, 끝없이 확장하려 한다.
하지만 내 안의 힘은 다르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지독하게 순수한 ‘소멸’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완벽한 무(無)로 되돌리는 힘.
나는 알렉시스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와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의 힘을 쓰면 쓸수록 그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힘을 내 ‘소멸’의 연료로 삼아 더욱 강력한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어머니는 나를 실패작이나 시한폭탄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신이 되려는 괴물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신살자(神殺者)의 독’으로 벼려낸 것이었다.
「카엘.」
나는 우리의 영혼을 잇는 가느다란 통로를 통해, 나의 모든 깨달음과 결의를 한 줄기 빛처럼 쏘아 보냈다.
「들려?」
얼음 감옥 속에서, 그의 의식이 희미하게 응답했다.
「…릴리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믿어. 아니, 믿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너를 믿는다는 것만 기억해.」
나는 더 이상 검붉은 번개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굳게 닫고 있던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호오?”
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감지한 알렉시스의 목소리에 흥미가 어렸다.
“드디어 현명한 선택을 할 마음이 든 게냐? 그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게 너를 바쳐라! 그리하면 저 늑대가 받는 고통을 멈춰주겠다!”
그는 내가 굴복했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의 오만함에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알렉시스의 저주, 그 검붉은 힘은 내 영혼을 태우는 불길이 아니라, 내 안의 잠들어 있던 공허를 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어머니가 심어놓은 독의 씨앗이 외부에서 밀려드는 동질의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흩어졌던 나의 모든 것이, 더욱 단단하고 치밀한 어둠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이건…!”
알렉시스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의 힘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힘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감히! 벌레 같은 년이, 신의 힘을 넘봐?”
그의 분노가 하늘을 뒤덮었다. 나를 향해 쏟아지던 번개가 수십 배는 더 굵고 맹렬해졌다. 카엘을 짓누르던 얼음 파도 역시 더욱 거세졌다. 그는 우리를 아예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내 안에서 완벽하게 각성한 ‘소멸’의 힘을, 더 이상 밖으로 방출하지 않았다. 그것을 칼날로 만들지도, 채찍으로 휘두르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그 모든 힘을 단 한 곳으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향해 집중했다.
그것은 알렉시스가 아니었다. 이 심상세계의 핵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카엘을 연결하고 있는 영혼의 고리.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저주받은 탑의 새로운 ‘심장’ 그 자체였다.
「카엘!」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외쳤다.
「지금부터 모든 연결을 끊어! 네 영혼을 나에게서 분리해! 어서!」
「무슨…! 안 돼! 그랬다간 당신 혼자 이 모든 힘을 감당해야 하오! 당신의 영혼이 버티지 못하고 소멸할 거야!」
「닥치고 해! 이건 명령이야, 카엘! 네가 살아야 내 복수도 의미가 있어! 네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되어야만 해!」
내 외침은 애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황녀로서 내리는, 그의 주군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어명이었다.
카엘의 영혼이 절규했다. 그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내 의지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그는 내 명령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돼… 릴리아, 제발…!”
그의 목소리가 현실의 탑 안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환각이 스쳤다.
나는 대답 대신, 내 안에서 들끓는 소멸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목표는 단 하나. 우리의 연결고리를 끊고, 그를 이 지옥 같은 심장부에서 강제로 튕겨 내보내는 것.
퍼어어어엉!
내 안에서, 우주가 터져 나갔다. 나와 카엘을 단단히 묶고 있던 영혼의 끈이, 내 의지에 의해 잔인하게 끊어졌다. 그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 존재의 절반이 뜯겨 나가는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제 이 지옥에는 나 혼자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어리석은 년! 그 늑대를 살려 보낸다고 해서,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알렉시스의 조소가 뇌리에 박혔다. 그의 말대로였다. 카엘을 떼어냄으로써, 나는 나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닻을 스스로 잘라낸 셈이었다. 이제 알렉시스의 모든 공격은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나는 비틀거렸다. 영혼이 찢겨나간 고통에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 남은 모든 것을 걸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래, 나는 살 수 없겠지.”
나는 나를 짓누르는 하늘의 알렉시스를 올려다보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알렉시스.”
“뭐라고?”
“너는 이 시스템의 왕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역시 시스템의 일부가 된 죄수일 뿐이야. 시스템이 무너지면, 너 역시 함께 소멸하게 되지. 안 그래?”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설마…!”
“그래, 바로 그거야.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하지만 이 판 자체를 엎어버릴 수는 있지.”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알렉시스의 모든 저주를, 그의 모든 분노와 증오를, 남김없이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너는 네 힘을 훔친 대가로, 네 힘에 의해 파멸하게 될 거야. 너는 새로운 신이 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이 만든 저주에 잡아먹히는 최초이자 마지막 바보가 되는 거지. 이보다 더 통쾌한 복수가 어디 있겠어?”
나는 내 안에 받아들인 알렉시스의 힘과, 내 본연의 ‘소멸’의 힘을 충돌시켰다. 그것은 물질과 반물질의 만남과도 같았다. 내 영혼 내부에서,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거대한 대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심상세계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호수가 갈라지고, 슬픈 푸른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발밑의 얼음 아래 갇혀 있던 수많은 영혼들이 빛의 입자가 되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것은 그들에게 구원이자, 동시에 소멸이었다.
“네 이 미친…! 멈춰! 당장 멈추지 못해!”
알렉시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나를 억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폭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이물질이 아니었다. 나는 이 세계 그 자체가 되어, 안에서부터 함께 자폭하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의식이 멀어져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첫 번째 생처럼 억울하지도, 회귀 직후처럼 외롭지도 않았다.
카엘. 그는 살아 나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내가 끝내지 못한 복수를,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내 존재가 빛의 입자가 되어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균열이 생긴 하늘 너머, 폐허가 된 탑의 옥좌에 홀로 남겨진 카엘의 모습을. 그는 텅 빈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내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고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것이 나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마침내 내 주변의 모든 것이 하얗게 불타오르는 순간.
나는 보았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어머니가 심어놓은 ‘독’의 씨앗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아주 작고 희미한 푸른빛의 씨앗 하나가 새롭게 움트고 있는 것을.
그것은 ‘소멸’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렉시스가 그토록 경멸했던, 초대 황제가 남겼다는 그 순수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복수의 시작이자 끝이 될 방아쇠를, 내 영혼의 심장부에서, 직접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