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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림자 속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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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칼날처럼 공기를 갈랐다. 하은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진우의 손이 그녀의 소매를 움켜쥐었고, 그 힘 때문에 천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하은,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됐어.”

중년 남자가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회사 법무팀 이사, 강 변호사였다. 그의 정장 소매에서 풍기는 가죽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와 섞이며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아스팔트에 메아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진우가 먼저 몸을 돌렸다. “또 누구야? 오늘 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거칠었지만, 끝부분이 살짝 갈라졌다. 손가락이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강 변호사는 천천히 다가오며 담배를 하나 꺼냈다. 불을 붙이는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진우 씨, 네가 숨긴 파일이 오늘 오후에 사장실 책상 위에 올라갔어. 하은 씨 이름이 그 파일 표지에 적혀 있더군.”

하은의 손등이 저려왔다. 아까 쏟은 커피 자국이 아직 따끔거렸다. 그녀는 진우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파일에 제 이름이 왜 들어가 있죠?”

민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제 그만. 하은, 너까지 끌어들이지 마.”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하은은 가볍게 뿌리쳤다. 수진은 구석에서 숨을 죽인 채 가방 끈을 비틀었다.

성호가 웃으며 연기를 내뱉었다. “재미있군. 강 변호사님, 그 파일이 정확히 뭐였는지 알려주시죠. 진우가 예전에 문서 조작한 그 일?”

강 변호사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이 안에 다 들어 있어. 진우 씨가 이전 회사에서 빼낸 계약서, 그리고 하은 씨가 그 계약을 검토한 기록까지. 두 사람이 이미 2년 전부터 연결돼 있었다는 증거지.”

진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내가 속아서 한 일이야. 하은 선배는 몰랐다고.”

하은은 그의 말을 자르며 강 변호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 파일을 왜 지금 꺼내는 거죠? 회사가 우리를 해고하려는 건가요?”

“해고는 시작일 뿐이야.” 강 변호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장님이 내일 아침에 두 사람을 직접 부를 거다. 그리고 민준 씨, 당신도 증인으로 불러들일 테고.”

민준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증인? 내가 왜?”

수진이 작은 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은아… 미안해. 내가 말한 게 여기까지 번질 줄은 몰랐어.”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손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딸깍 소리를 냈다.

골목 안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멀리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오자, 진우가 성호를 노려보았다. “이게 네가 말한 ‘더 큰 일’이냐? 하은까지 끌어들이려고?”

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냥 경고했을 뿐이야. 강 변호사님, 계속 말씀하세요. 우리 모두 듣고 싶으니까.”

강 변호사는 USB를 하은에게 건넸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 쥐자, 플라스틱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내일 아침 9시, 사장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빠지면, 그날로 계약 해지 통보가 나갈 거다.”

하은은 USB를 주머니에 넣으며 진우를 돌아보았다. “진우, 우리… 어떻게 해야 해?”

그의 눈이 흔들렸다. “도망칠 수는 없어.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도 없어.”

민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은, 지금이라도 내 말 들어라. 이 새끼들 다 버리고 돌아와.”

수진이 민준의 팔을 잡았다. “민준 씨, 지금은 하은이 결정할 일이에요.”

강 변호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 내일 보자.” 그의 발소리가 골목을 빠져나가며 점점 멀어졌다.

진우가 하은의 손을 붙잡았다. “아파트로 가자.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위험해.”

그들은 골목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차 안에서 하은은 창밖의 네온 불빛을 바라보았다. 진우의 무릎이 그녀의 무릎에 스치자 따뜻한 열기가 전해졌다. “진우, 그 파일… 정말 2년 전부터?”

진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가 그때 너를 처음 본 건 맞아. 하지만 그 파일은… 누군가 날 속여서 만든 거였어. 네가 연루된 건 나 때문이야.”

택시가 아파트 앞에 멈췄다. 하은이 먼저 내려서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진이 따라 들어왔다. “나도 같이 올라갈게. 아직 할 말이 있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세 사람의 숨소리만 울렸다. 수진이 하은을 바라보았다. “성호가 내게도 파일을 보여줬어. 하은아, 네가 그 계약서를 검토한 날짜가 진우가 입사한 날과 정확히 일치해.”

하은의 손이 엘리베이터 벽을 짚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바닥을 식혔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몰라.” 수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민준 씨가 그걸 이용하려고 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복도 불빛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렸다. 진우가 먼저 나서며 “들어와. 더 이상 숨길 게 없어”라고 말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하은은 소파에 앉아 USB를 꺼냈다. 노트북을 켜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진우가 그녀 옆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열어봐. 이제 다 드러날 테니까.”

파일이 열리자, 계약서 스캔본이 떠올랐다. 하은의 서명이 선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멈췄다. “이건… 내가 검토한 게 맞아. 그런데 왜 진우 이름이 여기에?”

진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계약은 내 이전 회사가 사기를 친 거였어. 내가 그걸 막으려다 오히려 끌려들었고, 하은 선배가 마지막 검토를 맡았던 거지. 그런데 누군가 그 기록을 조작해서 우리를 연결시켰어.”

수진이 창가에 서서 말했다. “그 누군가가 성호일 수도 있고, 민준일 수도 있어. 아니면… 더 위에 있는 사람.”

하은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내일 사장실에서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진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함께 가. 내가 다 말할게. 네가 위험해지게 둘 순 없어.”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은, 문 열어. 나야, 민준. 강 변호사가 방금 전화했어. 파일 내용이 더 있다고.”

진우가 몸을 일으키며 주먹을 쥐었다. 수진은 숨을 죽였다. 하은의 손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문을 열지 말지,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민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 파일, 진우가 아니라 네가 직접 만든 거라는 증거가 나왔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하은은 문을 열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진우의 눈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복도 불빛이 문틈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위기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문고리에서 미끄러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파일이 진짜라면, 내일 아침은 그들 모두에게 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강 변호사가 왜 마지막에 그 말을 빼먹었을까. 하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문밖의 민준이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에는 더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