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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문 앞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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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종 소리가 복도를 찌르고, 하은의 손가락이 문고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민준이 문턱을 넘어섰다. 그의 코트에서 비에 젖은 가죽 냄새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하은, 이거 봐. 강 변호사가 방금 보낸 메시지야.” 민준이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화면 속 파일명에 ‘하은_계약검토_2018’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놓치며, 문이 저절로 닫혔다.

진우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 “그 파일, 네가 만든 거라고?”

수진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민준 씨, 지금은 파일보다… 하은이 어떻게 느끼는지 먼저 물어봐야지.”

민준은 코트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느낌? 이 안에 네 서명이 두 번이나 찍혀 있어. 진우 이름이 들어간 계약서 검토 기록이야. 2년 전, 네가 직접 승인한 거라고.”

하은은 USB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플라스틱이 손바닥을 식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다시 켜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파일이 열리자, 낡은 계약서 스캔본이 떠올랐다. 그녀의 서명이 오른쪽 하단에 선명했다.

“이건… 내가 검토한 게 맞아. 그런데 왜 진우 이름이 여기 있지?” 하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손가락이 마우스를 세게 누르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진우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그 계약은 내 전 회사에서 사기를 치려던 거였어. 내가 막으려다 끌려들었고, 네가 마지막 검토를 맡은 거지. 그런데 누군가 기록을 조작한 거야.”

민준이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조작? 그걸 네가 어떻게 증명하지? 하은, 너도 이제 알겠지. 이 새끼 때문에 네가 위험해졌다고.”

수진이 한 걸음 다가오며 가방 끈을 비틀었다. “민준 씨, 그만해. 파일이 진짜인지부터 확인해야지.”

민준의 눈빛이 수진을 향했다. “확인? 이미 강 변호사가 확인했어. 내일 사장실에서 이 USB를 열 거야. 하은, 너는 증인으로 불릴 거고, 진우는 해고야.”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하은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그녀의 가슴이 조여들었지만, 손은 진우의 팔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진우가 민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해고? 좋아. 그런데 왜 네가 여기까지 와서 말하는 거지? 네가 이 파일을 퍼뜨린 거 아냐?”

민준의 턱이 꿈틀거렸다. “내가? 웃기지 마. 네가 하은을 끌어들인 게 문제지.”

수진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두 사람 다 진정해. 지금 중요한 건… 이 파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야.”

그때, 진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성호’라는 이름이 떴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메시지를 확인했다.

“성호가 보낸 거야. ‘내일 아침 8시, 사장실 앞에서 기다려. 파일 원본이 하나 더 있다.’”

하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진우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메시지 끝에 ‘수진도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손이 목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건… 성호가 착각한 거야. 나는 파일을 본 적 없어.”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진의 팔을 잡았다. “착각? 방금 네 이름이 메시지에 떴는데.”

진우가 몸을 일으키며 주먹을 쥐었다. “수진, 너…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야?”

수진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민준 씨가 파일을 이용하려고 해서, 그걸 막으려고 했을 뿐이야.”

하은은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진, 너도 성호와 함께한 거야? 나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방 안 침묵이 길어졌다. 바람 소리가 창틀을 스치며 낮은 울림을 남겼다. 진우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 아파트 밖으로 나가자.”

민준이 따라 나서며 “가긴 어디로 가?”라고 물었다. 진우는 대답 없이 문을 열었다. 복도 불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로비에서 하은은 진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민준은 뒤에서 따라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은, 지금이라도 USB를 버리고 돌아와. 회사에서 너까지 해고당하면 끝이야.”

수진은 로비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민준 씨, 그 USB… 진짜 원본이 아니야. 성호가 조작한 거라고.”

민준이 걸음을 멈추며 수진을 돌아보았다. “조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수진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성호한테 파일을 넘겨줬어. 그런데 그가 내용을 바꿔치기한 거야.”

하은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수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왜 그랬어?”

수진은 눈을 감았다. “네가 진우 때문에 다칠까 봐.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민준 씨한테 파일을 넘기라고 했던 거야.”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수진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고?”

진우가 민준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손 떼.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

로비 문이 열리며, 밖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담배를 문 채로 들어왔다. 그의 미소가 로비 조명 아래 번들거렸다.

“다들 모여 있네. 좋군. 내일 아침에 필요한 사람들 다 모였어.”

하은은 성호를 바라보았다. “너, 왜 여기 있어?”

성호는 USB를 하나 더 꺼냈다. “이게 진짜 원본이야. 수진 씨, 네가 넘겨준 파일과 내용이 달라. 진우의 과거 실수가 아니라, 하은 선배가 2년 전부터 진우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기록이지.”

진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성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성호는 USB를 하은에게 건넸다. “열어봐. 네가 진우를 처음 본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그리고 그날 이후로 네가 그의 파일을 몰래 확인한 흔적도.”

하은의 손이 USB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로비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파일이 실행되자, 새로운 계약서가 떠올랐다. 그녀의 서명이 아닌, 진우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진우가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몰랐던 기록이야.”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지? 하은, 네가 진우를 먼저 찾아간 거야.”

수진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수진의 팔을 잡았다. “하은아, 믿어줘. 나는 그냥… 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하은은 수진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키는 게 아니라, 이용한 거지.”

그 순간, 로비 문이 다시 열리며 박 과장이 들어왔다. 그의 전화기가 밝게 빛났다. “부장님 지시로 왔습니다. 내일 아침 사장실 대신, 지금 바로 회사로 가시죠. 사장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진우의 몸이 굳었다. “지금? 이미 밤인데?”

박 과장이 USB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파일 때문에. 사장님이 ‘더 큰 비밀’이 있다고 하시더군.”

하은은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민준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성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피웠다.

박 과장이 말했다. “두 사람, 차에 타세요. 그리고… 하은 씨, 당신 남자친구도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 증인으로.”

진우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가면 안 돼. 여기서 끝낼 수 없어.”

하은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로비를 나서며, 그녀는 수진을 돌아보았다. 수진의 얼굴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다.

밤공기가 로비를 스치며, 차가운 바람이 모두의 코트를 흔들었다. 박 과장의 차가 로비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진우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하은은 문을 잡고 멈췄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수진, 너… 정말 나를 배신한 거야?”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호가 웃으며 말했다. “배신? 그건 아직 시작일 뿐이야. 차에 타.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하은은 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멈췄다. 멀리서 또 다른 그림자가 로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 그녀의 심장이 멎을 듯 뛰었다.

진우가 차 안에서 그녀를 불렀다. “하은, 어서!”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은은 숨을 멈췄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하은, 기다려. 내가… 진짜 파일을 가지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