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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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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닿은 칼날의 서늘한 감촉에 남자의 비명이 반쯤 끊겼다.

“흐읍, 살려… 살려주시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돈은 얼마든지…!”

질척이는 뒷골목의 오물과 비릿한 소금기, 썩은 생선 냄새가 한데 뒤섞여 역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후두둑거리는 빗소리만이 남자의 애원을 집어삼켰다. 내 그림자가 남자의 육중한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칼날에 실린 힘을 미세하게 조절했다. 가죽을 파고드는 감각. 뜨거운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려 내 손등을 적셨다.

“컥!”

“계약은 절대적이야.”

속삭이는 내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차가웠다. 의뢰인은 이 남자의 ‘혀’를 원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투자자들을 속여 재산을 빼돌린 대가였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산인 목숨은 의뢰인의 관용 덕에 붙어있는 것뿐.

“누, 누가… 누가 의뢰한 거요! 말해주면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겠소!”

어리석은 질문. 용병 ‘그림자’는 의뢰인의 신원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바닥에서 내가 쌓아 올린 신뢰의 기반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단검을 쥔 손목을 가볍게 비틀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남자가 축 늘어진 고깃덩이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묵직한 전대를 꺼내 들었다. 의뢰받은 금액의 절반. 나머지 절반은 정보상에게서 받을 터였다.

나는 피 묻은 단검을 빗물에 헹궈내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카일루스 데 카이센 황녀 또한 죽은 자였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나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감각은, 이 피비린내와 금화의 무게감뿐이었다.

***

정보상 ‘잭스’의 허름한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곰팡내와 싸구려 럼주 냄새로 가득했다. 내가 전대를 던지자, 잭스는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 무게를 가늠하더니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림자 님! 이번 건도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셨군요. 항구에서 제일 입이 걸던 뚱보 녀석이 잠잠해지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나머지 잔금이 든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잭스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쥐 같은 눈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저… 그림자 님. 혹시 다음 일거리에도 관심 있으신지….”

“조건.”

내 짧은 대답에 잭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침을 튀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의뢰인은… 거물입니다. 아주 거물이에요. 보수는 지금까지 받으셨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겁니다. 이 도시를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죠.”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이 바닥에서 그런 액수는 목숨을 열 번은 내놓아야 만져볼 수 있는 돈이다. 보통은 왕족 암살이나 국가 전복 같은 미친 의뢰에나 붙는 금액이었다.

“목표가 누군데.”

“그게… 목표가 없습니다.”

“장난하나?”

내 목소리에 냉기가 어리자 잭스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 말은, 누굴 죽이거나 훔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냥… ‘호위’ 임무입니다. 의뢰인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거죠.”

“그 정도 금액에 단순 호위일 리가.”

내 눈빛이 가늘어졌다. 내 의심에 잭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두툼한 양피지에 찍힌 선명한 황금빛 인장.

나는 숨을 멈췄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서로의 목을 물고 있는 형상. 힘과 견제, 그리고 영원을 상징하는 카이센 제국의 황실 문장이었다. 5년 전, 나를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밀어 넣었던 바로 그 문장.

“……거절한다.”

몸 안쪽부터 차가운 한기가 피어올랐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폐부 깊숙이 차오르던 얼음물의 기억, 나를 배신했던 오라비들의 미소, 그리고… 비명조차 삼켜버렸던 그날의 절망.

“그, 그림자 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기회는 다시없습니다!”

“제국과 얽힐 생각 없어. 다른 용병을 찾아봐.”

나는 차갑게 몸을 돌렸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이곳에 있다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제국의 ‘제’ 자만 들어도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그 지옥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의뢰인이 그림자 님을 ‘직접’ 지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잭스의 절박한 외침이 등 뒤에 박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잭스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국에서 온 분이…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작은 편지 봉투였다. 황실 문장이 찍힌 것과는 다른, 평범한 봉투. 하지만 그 위에 찍힌 작은 밀랍 인장을 보는 순간, 내 발은 바닥에 뿌리박힌 듯 굳어버렸다.

그것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나의 스승이자 제국 기사단장이었던 알렉산더 경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검과 방패 문양의 인장이었다. 그는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그날, 국경 수비 임무를 떠나 수도에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이 적혀 있었다.

알렉산더 경의 필체가 분명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어떻게 내가 살아있는 걸 안 거지? 지난 5년간 그림자로 활동하며 과거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의뢰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

잭스가 알려준 장소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낡은 등대였다. 비는 그쳤지만, 바다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시야를 방해했다. 등대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함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등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내게 잠긴 문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녹슨 철문이 열리고, 나는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내내 퀴퀴한 먼지 냄새와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등대 꼭대기, 등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창밖의 안개 낀 바다를 등지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값비싼 원단의 검은 코트, 허리춤에 찬 장검. 평범한 여행객은 아니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개를 머금은 희미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생각보다 젊은 남자였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은발과, 그보다 더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조각상처럼 무감정한 얼굴이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림자.”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당신이 알렉산더 경이 보낸 사람인가?”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손은 언제든 단검을 뽑을 수 있도록 품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 소문을 들었다면, 이 이상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물론 들었소. 대륙 최고의 용병. 피도 눈물도 없는 암살자. 의뢰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죽이는 그림자.”

남자는 내 코앞에서 멈춰 섰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 그의 푸른 눈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하지만 내게 당신은 그저….”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비웃는 것도, 환영하는 것도 아닌, 기묘한 미소였다.

“길 잃은 작은 공주님일 뿐이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작은 공주님. 어릴 적, 황제 폐하만이 나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황족 외에는 극소수였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당신, 정체가 뭐야.”

내 목소리가 뱀처럼 낮게 깔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살기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서 차가운 겨울 냄새가 났다.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 그리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 줄 사람.”

그러고는 그는 모든 격식을 갖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기사가 황족에게 예를 표하는 자세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푸른 눈이 나를 정면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것은 경외심도, 충성심도 아니었다. 그것은… 집요한 소유욕과 광기에 가까운 열망이었다.

“카일루스 데 카이센 황녀 전하.”

내 진짜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는 것 같았다. 지난 5년간 필사적으로 묻어두었던 과거가, 유령처럼 내 앞에 나타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헛소리. 그런 사람은 죽었어.”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남자의 다음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혔다. 아버지, 단 한 명의 제국 황제.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워했던 유일한 사람.

“황태자와 2황자가… 옥좌를 두고 내전을 벌일 기세입니다. 제국은 곧 갈라지고 불타게 될 겁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쫓겨난 황녀에게 뭘 기대하는 거냐고.”

“황녀 전하만이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나는 비웃었다. 나를 죽이려 했던 그들을 위해, 나를 지켜주지 못했던 제국을 위해 내가 왜 피를 흘려야 하지?

남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마지막 제안을 건넸다. 그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되찾으십시오. 황녀 전하의 자리, 명예, 그리고… 복수할 기회까지.”

그의 푸른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제가 드릴 계약금입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5년 전, 그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당신을 밀어 넣으라 명령한 자의 이름. 그걸 알려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