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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과거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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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단어는 저주와도 같았다. 5년 전, 나를 얼어붙은 강물로 밀어 넣으라 명령한 자의 이름. 그것은 내 지난 세월을 통째로 부정하고, 잿더미가 된 줄 알았던 복수심에 다시 불을 붙이는 기름이었다. 숨을 들이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폐가 아려왔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품 안에 숨긴 단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지금, 내 영혼을 통째로 사겠다며 악마의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그 이름을.”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삐걱이는 등대의 낡은 나무 바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어떻게 믿지?”

내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남자의 푸른 눈동자를 꿰뚫었다. 이 자가 던진 미끼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그 뒤에 숨겨진 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바닥에서 순진한 믿음은 곧 죽음이었다.

남자는 내 살기 어린 시선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마저 머금었다. 그 여유가 역겨웠다.

“믿음은 필요 없습니다, 황녀 전하. 오직 거래만 있을 뿐이죠.”

그는 품속에서 작은 원통을 하나 꺼내 내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들자 묵직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제국의 암호 통신에 사용되는 미스릴 합금 통이었다. 황실 기사단 중에서도 고위급 장교 이상만 다룰 수 있는 물건.

“그 안에는 제가 드린 이름의 주인이 지난 5년간 저질러 온 모든 악행에 대한 증거 목록이 들어있습니다. 자금 흐름, 비밀 장부의 위치, 매수한 자들의 명단까지. 진위는 ‘그림자’의 정보망이라면 하루 안에 확인 가능할 겁니다.”

나는 말없이 원통을 열었다. 촘촘하게 말린 양피지에는 알아보기 힘든 암호와 함께 익숙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가 알던 제국의 귀족들, 고위 관료들. 그리고 그 정점에 찍힌 단 하나의 이름.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얼음 조각에 찔린 듯이 시큰거렸다.

“어째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황녀 전하께서 그 이름을 들었으니, 이제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는 내 혼란을 비집고 들어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마치 내 마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남자, 카일루스라는 황녀가 아닌 용병 ‘그림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얕보고 있었다.

나는 양피지를 다시 원통에 집어넣고 그의 발치에 던졌다. 쨍, 하는 금속성 파열음이 등대 안에 울렸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군.”

“……말씀하시죠.”

남자의 푸른 눈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나는 더 이상 카일루스 데 카이센이 아니야. 그 이름은 5년 전 강물에 빠져 죽었어.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용병 그림자다.”

나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이번에는 그가 물러서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러니 의뢰 내용을 정정하지. ‘죽은 황녀의 귀환’ 따위가 아니야. 대륙 최고의 용병 그림자에게, 카이센 제국의 황위를 가져다 달라는 의뢰다.”

내 말에 등대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는 아마도 복수심에 불타는 어린 황녀가 제자리만 되찾게 해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는 틀렸다. 5년간 지옥을 구르며 내가 배운 것은, 내 운명은 내가 직접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계약금은 네가 제시한 그 이름으로 받지. 그리고 성공 보수는….”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제국의 옥좌, 그 자체로 받겠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깥에서는 파도 소리만이 멀게 들려왔다. 이윽고 남자의 입가에 조각 같은 미소가 걸렸다. 이전의 그 기묘한 미소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만족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거래, 성립입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 이름은 이안입니다. 이안 데 발레리우스. 이제부터 황… 아니, 그림자 님의 제국 내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드리죠.”

발레리우스. 북부를 지키는,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공가. 그들이라면 황실 첩보망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이안이라는 남자의 정체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

나는 내 유일한 거처인 여관의 낡은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새벽의 희미한 빛이 방 안의 먼지들을 비췄다. 침대 하나, 낡은 책상 하나가 전부인 공간. 이곳이 지난 5년간 나를 지켜준 요새였다.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배낭을 열었다. 안에는 독약이 든 작은 병들, 용도별로 날을 세운 단검 여러 자루, 와이어와 자물쇠 따개 같은 도구들이 전부였다. 카일루스 황녀가 입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은 없었다. 그림자의 재산은 오직 살인을 위한 도구뿐이었다.

거울 앞에 섰다.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얼굴에서는 황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아무렇게나 잘라낸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을 잃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왼쪽 눈썹 위에는 의뢰를 수행하다 생긴 옅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나는 이안이 건넨 양피지 속 이름을 떠올렸다.

나를 향해 언제나 인자하게 웃어주던, 병약한 나를 위해 직접 약을 달여주겠다며 정성을 보였던,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장 살갑게 나를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들, 2황자 에반은 나를 곧잘 따르던 유순한 동생이었다. 그 모든 것이 가증스러운 연극이었다는 사실이 피가 역류할 듯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녀는 왜? 1황자 아서가 건재한 이상, 자신의 아들 에반이 황위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했다. 고작 나 하나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였을까. 아니, 어쩌면 나를 죽인 것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유일한 딸이자 가장 총애받던 자식. 나를 제거함으로써 황제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황자들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려던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의 위선적인 무대 위로, 죽은 자가 되어 돌아가 그들의 목에 직접 칼을 꽂아 넣어야만 했다.

나는 배낭을 챙겨들고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여관 주인에게는 남은 기간의 방세를 금화 하나로 던져주고, 아무 말 없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항구 도시의 거리로 나섰다. 그림자는 이제 과거가 될 것이다. 새로운 내가 태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

이안과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는 도시 외곽의 마구간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여행 준비를 마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여행객으로 위장한 마차 한 대와 말 두 필. 그는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차림으로는 곤란합니다. 그림자 님.”

그가 내민 것은 꾸러미 하나였다. 펼쳐보자 수수한 디자인이지만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여행용 드레스와 두툼한 망토가 들어있었다.

“수도까지 가는 동안, 당신의 신분은 북부에서 피난 온 하급 귀족 영애 ‘아리아’입니다. 용병의 흔적은 최대한 지우는 것이 좋겠죠.”

나는 말없이 옷을 받아 들었다. 그의 준비성은 치밀했다. 마구간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는 내게 작은 손거울을 건넸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어두운 녹색 드레스와 머리를 가리는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은 영락없는 귀족 영애였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숨길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해진 자의 공허하고 날카로운 눈빛.

“나쁘지 않군.”

내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이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까지는 열흘 정도 걸릴 겁니다. 가는 동안 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려드리죠. 아셔야 할 것들이 아주 많을 테니.”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이안이 직접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잡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좁은 마차 창밖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항구 도시를 바라보았다. 지난 5년간 나를 살아있게 했던 피비린내 나는 도시가 한 줌의 풍경으로 사라졌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두 달 전부터 위독하십니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에 중독되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서서히, 사람을 말려 죽이는 종류의 독이죠.”

이안의 차분한 설명이 마차의 덜컹거림을 뚫고 들려왔다.

“아버지가… 독에?”

“예.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는 서로를 의심하며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수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녀 전하의 귀환은… 어느 한쪽에겐 구원이, 다른 한쪽에겐 파멸의 신호탄이 되겠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알렉산더 경은? 스승님은 어디에 계시지? 그분이 날 부른 게 아닌가?”

내게 편지를 보낸 유일한 사람. 내 생존을 알고 있던 단 한 명의 아군.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침묵이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 톤 더 낮아져 있었다.

“기사단장 알렉산더 경은….”

마차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덜컹거리며 속도를 냈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내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재 반역죄로 황실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고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말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유일한 희망, 유일한 동아줄이라 믿었던 존재가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더 경의 이름을 판 누군가의 계략. 그렇다면 내 앞의 이 남자, 이안 데 발레리우스는 대체 누구의 사람인 거지?

내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숨겨둔 단검으로 향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깊었다. 마치 내 모든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환영합니다, 황녀 전하. 지옥이 된 당신의 제국에 오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