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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화: 도망자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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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수를 헤집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두개골 안쪽에서 직접 울리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침입이었다.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조차 사치였다.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 나만이 존재해야 할 그 성역에 흙발을 딛고 들어선 이질적인 존재감에 온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세상이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일그러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드디어… 나의 레나를….’

그 오만한 속삭임이 반복될 때마다 쇄골 아래의 낙인이 불타는 숯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피부 아래 혈관을 타고 차가운 독이 퍼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숨이 막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무너졌다. 쿵, 하고 머리를 부딪치는 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전하! 정신 차리시오!”

카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멀었고, 내 머릿속을 채운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그것은 내 기억을, 내 감정을, 내 존재 자체를 샅샅이 훑으며 탐욕스럽게 맛보고 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젠장…! 벌써 시작된 건가!”

카엘은 거친 욕설을 뱉으며 내 몸을 돌려 눕혔다.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내 드레스의 목 부분을 찢듯이 잡아 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맨살에 닿는 수치심보다, 맹렬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낙인을 그에게 보이는 것이 더 끔찍했다.

그는 자신의 두 손가락을 모아, 빛나고 있는 문양의 정중앙을 강하게 압박했다.

“큭…!”

정신을 잠식하던 고통과는 다른, 날카롭고 물리적인 아픔이 전신을 꿰뚫었다. 마치 벌겋게 달군 인두를 상처에 그대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었다. 너무나 아파서, 순간 머릿속을 헤집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핏줄이 불거진 팔로 나를 억누르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버티시오! 그 목소리에 의식을 내주면 끝이야! 이것은 고통이지만, 당신의 의식을 붙들어 둘 유일한 닻이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눈에도 끔찍한 고통과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내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있다는 듯이.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그의 말대로 이 새로운 고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낙인의 아픔이 뇌리를 채울수록, 이질적인 속삭임은 파도처럼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낙인의 붉은빛이 잦아들고, 카엘이 손가락을 떼었을 때, 나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릿속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평온이 아니라, 모든 것이 파괴된 뒤의 공허함이었다.

“하아… 하아… 방금… 그건 대체….”

“붉은 달의 부름이오.”

카엘은 내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나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식은땀이 그의 턱선을 타고 흘렀다.

“낙인은 그들과 당신을 잇는 길이야. 이제 그들은 언제든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의 위치를 느끼고, 당신의 정신에 간섭하려 들 거요. 내가 낙인을 가지고 있을 땐, 내 마력으로 간신히 방어벽을 치고 있었지만… 진짜 주인인 당신의 몸에 새겨진 낙인은 차원이 달라.”

그의 설명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제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 모든 계획과 복수는 시작부터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럼… 침묵의 현자의 탑으로 가도 소용없는 거 아닌가? 가는 도중에 위치가 발각될 텐데.”

“그렇지 않소. 탑 주변은 고대의 강력한 결계로 둘러싸여 있소. 그들의 추적이 닿지 않는 유일한 성역이지. 문제는… 탑에 도착하기까지 버텨내는 것이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앙상한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었다. 그의 눈빛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몰랐다.

“일어나시오, 전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그들이 ‘부름’을 보냈다는 건, 가장 가까운 하수인들에게 이미 당신의 위치를 전송했다는 뜻이야.”

그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사냥꾼들에게 위치가 노출된 사냥감이었다. 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복수도, 제국도, 지금 당장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밤새도록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별빛조차 희미한 침엽수림 사이를, 짐승처럼 숨을 죽인 채 나아갔다. 카엘은 놀라울 정도로 북부의 지리에 밝았다. 그는 인간의 길을 피하고, 험준한 산세와 계곡의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의 부상은 심각했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틀거리는 나를 몇 번이나 부축해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불필요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 이후, 우리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과 의문이 쌓여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그를 믿어야 할지, 여전히 증오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이 지옥 같은 길 위에서, 그와 나는 서로의 목숨을 쥔 유일한 동반자라는 것.

꼬박 이틀을 더 걸었을 때, 우리는 눈 덮인 산 중턱에서 버려진 사냥꾼의 오두막을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았지만, 눈보라를 피할 지붕과 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카엘의 상처는 이미 덧나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나 역시 수면 부족과 허기로 정신이 아득했다.

오두막 안은 냉골이었지만, 다행히 낡은 벽난로와 마른 장작 몇 개가 남아있었다. 나는 부싯돌을 꺼내 서투르게 불을 피웠다. 희미한 불꽃이 피어오르자,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녹는 듯했다. 카엘은 벽에 기댄 채, 감은 눈에 고통을 새기며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찢어두었던 드레스 자락을 근처의 녹은 눈으로 적셔, 그의 이마와 목을 닦아주었다. 그의 뜨거운 피부에 천이 닿자, 치익 소리를 내며 김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열에 들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머니… 정원의… 저주는… 막아야….”

정원의 저주. 또 그 단어였다. 황궁의 금서고에서 읽었던, 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 이 모든 일의 시작점. 나는 그의 곁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진실의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쇄골의 낙인이 다시 한번 타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나는 숨을 헙, 들이마셨다. 또다시 ‘부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머릿속을 헤집는 목소리 대신, 눈앞에 생생한 환영이 펼쳐졌다.

눈에 익은 황궁의 복도.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붉은 융단이 깔린, 나의 집무실 앞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가장 신뢰했던 시녀, 마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유리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앞에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비의 최측근이자,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인 마커스 경이었다.

“일은 어찌 되었나.”

마커스 경의 목소리는 낮고 냉정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평소의 유순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날카롭고 계산적인 어조로 보고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입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예상대로 카엘 경을 구하기 위해 벨라스 영지로 향하셨습니다.”

“해독제는?”

“네. 황비 전하께서 하사하신 그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가셨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리아의 입가에 뱀처럼 교활한 미소가 걸렸다.

“황녀 전하의 몸에 새로운 주인의 표식이 아름답게 피어났겠지요. 이제 그분은 길 잃은 어린 양이 아닙니다. 제단에 오를 준비가 된, 가장 완벽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심장이 멎었다. 아니, 얼어붙었다. 뇌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마리아. 이전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상냥한 마리아. 그녀가 처음부터 황비의 사람이었다고?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감시하고 보고하던 첩자였다고? 그녀의 따뜻한 위로와 걱정 어린 눈빛, 그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기 위한 정교한 연극이었다는 말인가.

환영 속에서 마커스 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붉은 달의 어르신들께서도 너의 공을 높이 사실 게다. 이제 황녀가 스스로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가여운 분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에 배신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절망 속에서 천천히 영혼이 좀먹히겠지.”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내 심장에 박혔다. 환영이 서서히 흩어지며, 눈앞에 낡은 오두막의 벽과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는 카엘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내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전하! 또 부름이었소? 대체 무엇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배신감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혐오였다. 두 번의 생을 살았음에도, 나는 또다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칼에 등을 찔렸다. 나의 회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이전 생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이 지독한 배신감 앞에서 터져 나오고 말았다.

“마리아가….”

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부서져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마리아가… 황비의 첩자였어. 처음부터… 전부….”

내 고백에 카엘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듯한 씁쓸한 표정이었다.

“역시… 그랬군. 당신 주변에 그들의 사람이 없을 리가 없지.”

그의 담담한 반응이 오히려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나 혼자만 바보처럼 믿고 있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채로. 헛웃음이 오두막의 정적을 갈랐다.

그때였다.

타닥, 타닥, 하고 평화롭게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길이 갑자기 푸른빛으로 변하며 사그라들었다. 오두막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뜩이며, 어둠에 잠긴 오두막의 유일한 출입문을 노려보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바람 소리가 그쳤다. 완벽한 침묵. 그 침묵은 평화가 아닌, 폭풍 전의 전조였다.

그리고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삐걱이는 낡은 문틈으로 무언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붉은 달의 그것과는 다른, 시체처럼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었다.

“젠장….”

카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놈들의 사냥개가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두막의 나무 문이 안쪽으로 찢겨나가듯 부서져 내렸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것의 형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늑대와 거미를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실루엣,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오직 우리를 향해 빛나고 있는 굶주린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