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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는 법이지.”
김태준 비서의 얼음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휴대폰 화면은 이미 검게 잠겨 있었지만, 그 잔인한 문장은 차 안의 공기에 낙인처럼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엔진이 꺼진 자동차 안은 죽음처럼 고요했다. 창밖, 보육원 정문 앞에서는 박 원장님이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26년간 나를 키워준 저 따스한 미소가, 실은 내 목을 겨누는 단두대의 칼날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저… 개새끼들….”
옆자리에서 준서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은 핸들을 쥔 채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격렬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차 문을 박차고 나가 모든 것을 부숴버릴 기세였다.
“가지 마. 이건 함정이야. 저 여자가 문을 열어주면 우리가 제 무덤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했잖아.”
그가 으르렁거리며 내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오직 한 곳, 박 원장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조각나고 부서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냥개였다. 주인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언젠가 진짜 사냥감이 나타나면 그를 대신해 죽어줄 운명. 그리고 이제, 사냥이 끝나가고 있었다.
“가야 해.”
내 목소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평온했다. 준서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미쳤어? 지금 제정신이야? 듣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들이 우리가 제 무덤으로 걸어 들어오게 될 거래. 그렇다면 기꺼이 걸어 들어가 주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장 순진하고 멍청한 사냥개의 얼굴을 하고서.”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 눈에 서린 결연한 냉기에, 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우리는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될 거야. 하지만 저 문으로 들어가면, 적어도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있어. 그들이 우리를 이용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그들이 짜놓은 판의 마지막 그림이 뭔지. 알아야… 반격할 수 있어.”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들끓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고, 그 자리에 차가운 결의가 들어찼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지막 연극을 위해 가면을 쓰고 차에서 내렸다.
“원장님!”
나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비누 향과 햇볕에 잘 마른 옷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 그 향기는 역겨운 위선처럼 느껴져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 하린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니. 준서 도련님까지… 웬일이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26년간 나를 완벽하게 속여온 베테랑 연기자였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원장님… 저 너무 무서워요.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에요.”
내 연기에, 그녀의 눈에 아주 찰나의 만족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원장실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낡은 책상과 빛바랜 소파, 벽에 걸린 아이들의 웃는 사진들까지. 한때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던 이 공간이, 이제는 사방이 막힌 감옥처럼 느껴졌다. 원장님은 우리 앞에 따뜻한 보리차를 내려놓았다.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그 눈은 집요하게 우리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찾았어요. 하린이가… 제 동생이 아니라는 것도, 다른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그의 고백에 원장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슬픔과 연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 언젠가는 알게 될 줄 알았단다. 너희 어머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셨지.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녀는 탁자 서랍을 열어 낡은 서류 봉투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앞에 조심스럽게 밀어놓았다.
“이게… 너희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기신 거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위조된 여권과 편도 비행기 티켓, 그리고 상당한 액수의 달러 뭉치가 들어 있었다.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세상의 반대편이었다.
“어머님께서는 모든 것이 밝혀지면, 너희가 이곳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 삶을 살기를 바라셨어. 더 이상 이 집안의 비극에 얽매이지 않고… 너희 둘만의 행복을 찾기를 말이야.”
그녀의 말이 달콤한 자장가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이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의 완벽한 탈출구. 김태준이 말한 ‘마지막 요람의 역할’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를 영원히 이 판에서 지워버리는 것. 아마 저 비행기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도착하더라도 우리의 흔적은 그곳에서 깨끗이 사라지게 될 터였다.
나는 여권을 쥔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이 지독한 연극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결의의 눈물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우리가…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요?”
내 가녀린 질문에, 원장님의 얼굴에 안도와 승리감이 뒤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 손길이 마치 거미줄처럼 끈적하게 느껴졌다.
“물론이란다, 아가.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오늘 밤 11시 비행기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어서 준비해야겠구나.”
우리는 그녀가 내민 독이 든 사과를 받아 든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처럼 조종당하며 원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등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우리가 완전히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보육원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준서가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이쪽이야!”
그는 주차장 쪽이 아닌, 건물 뒤편의 낡은 울타리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하늘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우리 둘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어릴 때 내가 만들어 놓은 개구멍이야. 기억나?”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기억나고말고. 답답한 보육원을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몰래 드나들던, 나만의 비밀 통로였다. 그는 그곳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울타리 밑, 덤불에 가려진 좁은 틈이 보였다. 어른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우리가 그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거기 서!”
등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가 땅을 울리며 쫓아왔다. 원장실에서 나온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남자들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는 끝장이었다.
“먼저 가!”
준서가 내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울타리 앞으로 나자빠졌다.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내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돌아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불과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금속 막대가 들려 있었다.
“시간 없어!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넌 무조건 여기서 빠져нага.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수빈 씨를 찾아. 그녀를 지켜. 이게 내가 너한테 부탁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이야.”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나를 향한 경멸이나 증오가 없었다. 오직, 하나뿐인 동생을 지키려는 오빠의 절박함만이 가득했다.
“싫어! 혼자 안 가!”
나는 울부짖으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단호하게 떼어냈다.
“가. 뒤돌아보지 말고.”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괴물처럼 달려드는 남자들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정면으로 맞섰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준서 오빠!”
내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쏟으며 좁은 틈으로 기어 들어갔다. 철조망이 살을 긁고, 젖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울타리 너머로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짐승처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역부족이었다. 한 남자가 휘두른 둔기가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핏물이 번지는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가….’ 그의 입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들 뒤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완벽하게 다려진 수트 차림의 김태준 비서였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무릎 꿇은 준서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울타리 너머의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 아주 옅고도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잘 짜인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감상하는 연출가처럼.
그리고 그는 내 눈을 똑똑히 보며, 준서를 향해 나지막이 명령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처리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남자가 준서의 머리 뒤로 금속 막대를 높이 쳐들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 세상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이, 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