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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제22화: 잿더미 위에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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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둔탁하고, 축축하고, 생명이 으깨지는 그 끔찍한 파열음이 고막을 뚫고 들어와 내 두개골 안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김태준의 싸늘한 미소. 금속 막대를 치켜든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힘없이 고꾸라지는 준서 오빠의 실루엣. 시간과 공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압축되기를 반복했다. 내 세상은 그 소리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아.”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희미한 탄식. 온몸의 신경이 끊어지고 근육이 마비되는 감각. 울타리 너머, 어둠 속에서 그들은 마치 한 편의 잔혹극을 끝낸 배우들처럼 무심하게 서 있었다. 김태준은 내 쪽을 향해 아주 희미하게, 조롱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보았느냐. 이것이 네 운명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짐승 같은 생존 본능이 마비된 이성을 걷어차고 튀어 올랐다.

‘가….’

준서 오빠의 마지막 입모양.

‘이수빈 씨를 찾아. 그녀를 지켜.’

그의 마지막 명령.

그것이 내 발에 박힌 보이지 않는 대못을 뽑아냈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다. 나는 미끼였고, 사냥개였다. 하지만 사냥개가 주인의 손을 물어뜯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발이 땅에 닿는 감각도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칼날이 되어 폐부를 찢는 것 같았다. 덤불이 옷을 찢고 나뭇가지가 뺨을 할퀴었다. 등 뒤에서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환청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뛰고 또 뛰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그들을 모두 지옥으로 끌고 내려가야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낡은 상가 건물의 후미진 골목으로 몸을 던져 쓰레기통 뒤에 웅크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입에서는 피 맛이 났다. 젖은 흙과 쓰레기의 악취, 그리고 내 온몸에서 풍기는 공포의 냄새가 뒤섞여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참을 그렇게 숨어 거친 숨을 고르는데,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 없는 오열이었다. 입술을 깨물어 터뜨려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나는 목구멍을 틀어막고 울었다. 미안해. 오빠,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

나 때문이 아니었다.

흐느낌이 멎었다. 눈물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그 자리에 얼음보다 차갑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관통했다. 증오. 뼈를 깎아 새기고 싶은 선명한 증오였다. 나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복수자였다.

***

영수의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엉망이 된 옷, 흙투성이 얼굴, 핏자국이 말라붙은 입술. 비밀번호를 누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나는 그저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의 노크 끝에, 잠이 덜 깬 얼굴의 영수가 문을 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동그랗게 뜬 눈으로 굳어버렸다.

“야, 너… 너 이게 무슨….”

나는 대답할 힘도 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 쓰러졌다. 그가 기겁하며 나를 부축해 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실내 공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나는 현관에 주저앉아 위액까지 전부 게워냈다. 영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내 등을 쓸어주고, 젖은 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의 침대에 눕혀졌을 때, 나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끝없이 달렸다. 등 뒤에서는 준서 오빠를 쓰러뜨린 그 둔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쫓아왔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잔 모양이었다. 낯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끔찍한 현실이 파도처럼 다시 밀려왔다. 준서 오빠. 김태준. 박 원장. 그리고 이수빈. 머리맡에는 영수가 사다 놓은 것인지 새 옷과 따뜻한 죽이 놓여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억지로 죽을 삼켰다. 살아야 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거실로 나가자, 영수가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나온 것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린아,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락도 안 되고….”

나는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가 겪은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어머니의 테이프, 쌍둥이 언니의 존재, 박 원장님의 배신, 그리고… 준서 오빠의 마지막까지. 내 이야기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보고서처럼 건조했다. 영수는 입을 다문 채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얗게 질려갔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영수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해. 이건 살인이야.”

“소용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경찰 위에 있어. 증거도 없어. 내가 나타나는 순간, 나는 정신이상자나 상속 재산을 노린 사기꾼이 되어 있겠지. 김태준은 그런 걸 꾸미는 데 도가 튼 인간이야.”

“그럼… 그럼 어쩔 건데. 이대로 숨어 지낼 거야?”

“아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눈에 서린 독기를 본 영수의 어깨가 움찔했다.

“싸울 거야. 그들이 만든 판 위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나는 그의 노트북을 빌려 인터넷을 켰다. 손가락이 자판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강한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자, 수많은 기사와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젊고 유능한 경영인, 따뜻한 인품을 지닌 사회 사업가, 완벽한 재벌 3세. 온통 그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위선적인 가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뻐꾸기 새끼.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진짜 새끼를 밀어내고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영수야.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대포폰 하나만 구해줄 수 있어? 절대 추적당하지 않는 걸로.”

***

다음 날 저녁, 나는 손에 쥔 대포폰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내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한서 오빠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린아! 너였구나!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오빠가 얼마나 걱했는 줄 알아? 보육원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연기는 그만하지.”

내 차가운 한마디에 그의 말이 끊겼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전류처럼 흘렀다.

“무슨 소리니, 하린아. 오빠는 정말….”

“만나서 얘기해. 오늘 밤 10시, W 호텔 스카이라운지. 둘만. 만약 1분이라도 늦거나, 쓸데없는 꼬리를 달고 오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세상에 터뜨려 버릴 테니까.”

나는 내 손에 쥔 유일한 패를 던졌다. 어머니의 테이프. 그가 ‘강한서’가 아니라는 진실. 그것이 김태준의 아킬레스건이자, 이 거대한 사기극의 심장이었다.

“…알았다. 갈게. 그러니까 섣부른 짓은 하지 마. 오빠는 널 해칠 생각이 없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서늘한 살기를 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겁에 질려 울던 강하린이 없었다. 잿더미 위에서, 증오를 양분 삼아 피어난 독초 같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영수가 구해준, 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블랙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짙은 화장으로 핏기 없는 얼굴을 덮고, 슬픔과 공포를 감췄다. 이것은 나의 전쟁이었다.

W 호텔 스카이라운지는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나는 가장 구석진, 하지만 입구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정확히 10시. 약속한 시간에 한서 오빠가 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완벽한 수트 차림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치 사랑하는 여동생을 만난 오빠처럼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 작은 촛불이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많이 변했구나, 하린아.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지만, 나를 훑는 그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빠야말로 변한 게 없네. 그 역겨운 가면 말이야.”

내 도발에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여유롭고 우아했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듯이.

“그래서, 네가 세상에 터뜨리겠다는 게 뭔지 들어볼까?”

그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 위로 작은 디지털 녹음기 하나를 꺼내 올려놓았다. 그가 준서 오빠의 방에서 보았던, 김태준이 보낸 바로 그 기계였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 안에,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겨 있어.”

나는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이 이 집안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 김태준이 심어놓은 뻐꾸기 새끼라는 것. 그리고… 윤지훈 씨의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까지.”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서늘한 무표정이 자리 잡았다. 그는 더 이상 친절한 오빠를 연기하지 않았다. 뱀처럼 차갑고 냉혹한 포식자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니? 어리석긴.”

그가 나지막이 비웃었다.

“그 테이프가 공개되면 누가 가장 곤란해질까? 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될 진짜 핏줄, 이수빈?”

그의 입에서 나온 이수빈의 이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린아. 넌 패를 너무 일찍 보여줬어. 네 손에 쥔 그 카드는… 나를 무너뜨리기엔 너무 약해.”

“그럴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 알아? 진짜 딸, 서아를 맡긴 사람의 이름. 그리고 그 아이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 그게 전부 녹음되어 있어. 내가 이걸 터뜨리면, 온 세상이 윤지훈의 숨겨진 딸을 찾아 혈안이 될 거야. 그때도 이수빈 씨가 안전할 수 있을까? 당신들 손아귀에서?”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의 눈에 선명한 살의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의 약점을 정확히 짚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이수빈을 찾는 이유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벽하게 제거하고 이 집안을 통째로 삼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괴물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나를 향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 단서 말인가?”

그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면을 밀어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네가 말하는 게… 혹시 이건가?”

휴대폰 화면 속에는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늦은 밤, 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여자가 피곤한 기색으로 자신의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수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 어두운 기둥 그늘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찾고 있었니? 네 언니.”

한서 오빠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걱정 마. 내가 아주 잘 ‘보호’해 주고 있으니까. 네가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