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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제23화: 악마의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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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화면 속에서, 내 얼굴을 한 여자가 웃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 어두운 주차장 기둥 그늘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미소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화면 속 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내 손에 들린 와인잔이 위태롭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내 몸의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빼앗아 가는 것 같았다.

“찾고 있었니? 네 언니.”

한서 오빠, 아니, ‘강한서’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괴물의 목소리가 실크처럼 부드럽게 고막을 감쌌다. 그 감미로운 음색 안에 숨겨진 독이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이가 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걱정 마. 내가 아주 잘 ‘보호’해 주고 있으니까. 네가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이수빈의 마지막 모습이 검은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내 유일한 희망에 덮개를 씌우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뱀처럼 나를 훑었다. 그 안에는 승리자의 여유와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잔인한 희열이 번들거렸다.

“어머니의 테이프. 그걸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순진하긴.”

그가 픽, 하고 비웃었다.

“넌 처음부터 체스판 위의 폰에 불과했어, 하린아. 널 움직이는 건 나고, 김 비서님이지. 넌 그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와 준, 아주 충실한 사냥개였을 뿐이고.”

테이블 밑으로 감춘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여린 살을 찢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심장을 후벼 파는 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서 오빠를 잃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원장님에게 배신당했다. 그리고 이제, 내 존재의 이유였던 쌍둥이 언니마저 저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사면초가. 아니, 이건 지옥 그 자체였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내 목소리는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내 태연한 반응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이 통하니 좋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어머니의 ‘유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테이프 원본 말이야. 디지털 파일 따위는 필요 없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원본. 그걸 내게 가져와.”

“그걸 주면… 언니를 풀어줄 거야?”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잠시 우리 쪽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이지. 난 약속은 지켜. 내 손에 그 테이프가 들어오는 순간, 이수빈은 평생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김 비서님께서 마련해 주신 아르헨티나행 비행기 티켓, 아직 가지고 있지? 조용히 떠나.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거짓말. 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테이프를 넘기는 순간, 나와 이수빈은 이 세상에서 조용히 ‘처리’될 것이다. 사냥이 끝난 사냥개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니까.

“생각할 시간을 줘.”

“시간? 좋아. 자비롭게 베풀어주지.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그때까지 테이프를 가지고 내게 연락해. 장소는 내가 알려주지. 만약 그때까지 연락이 없거나, 혹은 경찰 같은 멍청한 것들을 끌어들인다면….”

그는 말을 멈추고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

“주차장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강도 살인 사건,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더군.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목을 조이는 올가미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벽한 수트 핏, 흠잡을 데 없는 매너. 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손길이 마치 불에 달군 쇠처럼 뜨겁게 느껴져 몸을 피하고 싶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 동생. 네가 살고 싶다면 말이야.”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의 등이 서울의 화려한 야경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호텔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휘황찬란한 로비를 지날 때, 모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와 닿는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건물 벽에 몸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준서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 피 묻은 입술로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 이수빈을 지키라는 그의 마지막 명령. 그런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를 죽게 내버려 두고, 하나뿐인 언니마저 위험에 빠뜨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이었다. 눈물은 곧바로 차갑게 말라붙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잿더미 같은 공허함,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검고 단단한 증오의 씨앗이었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행선지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떼지 못하자,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손님,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갈 곳이 없었다.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영수의 오피스텔? 안 돼. 그들이 나를 미행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영수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한강 대교 남단으로 가주세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차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들이 흐릿한 잔상으로 번져갔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대포폰을 꺼냈다. 그리고 영수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하린아! 너 괜찮아? 그 자식 만났어?”

수화기 너머로 영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수야. 내 말 잘 들어.”

내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지금 당장 네 오피스텔에서 나와. 근처 PC방 같은 데로 가.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마. 그리고… 날 좀 도와줘야겠어.”

“무슨 일인데 그래? 너 목소리가 왜….”

“설명할 시간 없어. 오토바이 한 대만 구해줘. 그리고 현금. 네가 구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마지막으로, 다른 대포폰 하나 더. 30분 뒤에 한강 대교 남단, 첫 번째 전망대 밑에서 만나.”

나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전화를 끊었다. 영수는 분명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줄 것이다. 그는 유일하게 남은 내 편이었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는 말없이 현금을 내밀고 내렸다. 강바람이 칼날처럼 드레스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차가운 흙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

30분이 지났을까. 멀리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헬멧을 쓴 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 꼴을 보더니 기겁하며 달려왔다.

“야! 너 맨발이야?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그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가방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안에는 그가 급하게 마련한 듯한 두툼한 현금 뭉치와 새 대포폰, 그리고 낡은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들어도 돼. 대체 무슨 계획이야.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데. 너 설마….”

영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내가 섣부른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운동화로 갈아 신고, 드레스 자락을 찢어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내 모습을 본 영수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 원하는 건 테이프 원본이야. 내일 아침까지 가져오라고 했어. 그걸 주면 나와 언니를 살려주겠다고. 물론 거짓말이겠지.”

“그럼… 그럼 어쩔 건데. 진짜 그걸 갖다 주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 수많은 빌딩 숲 사이에서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한 건물을 노려보았다. SJ 그룹의 본사였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비밀’이야. 모든 진실이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상태. 그래야 이 집안을 통째로 삼킬 수 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거지.”

“그렇다고 그걸 터뜨리면 네 언니가 위험해지잖아!”

“그래. 그래서 판을 새로 짜야 해.”

나는 영수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나를 체스판 위의 폰이라고 했어. 맞아. 나는 폰이야. 하지만 폰도 끝까지 전진하면 퀸이 될 수 있어. 상대방의 왕을 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말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새 대포폰을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했다. 화면에 떠오른 행사 안내문을 확인한 내 입가에 희미하고도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오늘 밤, SJ 그룹 본사 최상층 컨벤션홀에서 열리는 가장 큰 행사였다. 정재계 인사들, 언론, 그리고 그룹의 모든 적과 아군이 모이는 자리. 김태준과 강한서가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 될 그 무대.

“하린아… 너 설마….”

영수가 내 표정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영수가 건네준 헬멧을 썼다. 차가운 금속과 플라스틱의 감촉이 오히려 나를 안정시켰다. 나는 마지막 남은 내 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수야. 내가 만약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가진 테이프 복사본, 세상 모든 언론사에 뿌려. 내 언니 사진이랑 같이. SJ 그룹의 진짜 상속녀라고.”

“너 미쳤어! 그건 자살행위야! 거길 어떻게 혼자 들어가서….”

“혼자가 아니야.”

나는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격렬하게 떨렸다.

“내 안에는, 나를 위해 죽어간 사람의 분노가 함께 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스로틀을 감았다. 오토바이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영수의 절규가 강바람에 흩어졌다. 나는 백미러를 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길, 악마들의 심장을 향해 뻗어 있는 그 길만 노려보았다.

그들이 깔아놓은 체스판을 엎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는 더 이상 그들의 폰이 아니었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게임의 판도를 바꿀, 조커였다.

SJ 그룹 본사 빌딩이 눈앞에 거대한 성벽처럼 다가왔다. 로비 앞에는 값비싼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 철통같은 보안. 쥐새끼 한 마리 얼씬할 수 없는 그들의 성.

그때, 주머니 속 대포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서일까? 아니면 김태준? 나는 오토바이를 건물 뒤편의 어두운 골목에 세우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막 끊으려던 순간,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하린 씨?”

“누구시죠?”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법이죠.”

목소리는 기계로 변조된 듯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분노는 숨길 수 없었다.

“SJ 그룹의 파티를 망치고 싶습니까? 당신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