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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멎었다.
아니, 내 심장이 멎었다.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만들어낸 눈부신 섬광 속에서, 핏자국이 선명한 셔츠를 입은 채 서 있는 저 남자의 실루엣은 현실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망령. 내 죄책감이 만들어낸 가장 끔찍하고도 달콤한 환상. 나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허공에서 멈췄다. 만지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그 손, 당장 치워.”
준서 오빠의 목소리는 지옥의 밑바닥에서부터 긁어 올린 듯 거칠고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는 행사장의 모든 소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 팔을 붙잡고 있던 경호원들의 손이 자석에 닿은 쇳가루처럼 움찔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무대 위의 강한서와 무대 아래의 김태준, 그리고 문 앞에 선 피투성이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강한서였다. 그의 얼굴에서 경악이 사라지고, 믿을 수 없다는 경멸과 독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너… 네가 어떻게 살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행사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스피커에서 둔탁한 소음과 함께 새로운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녹음 파일이었다.
김태준의 목소리였다. 보육원 앞에서 내가 들었던 바로 그 음성.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내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술렁임은 비명이 되었고, 의혹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김태준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준서 오빠가 비틀거리면서도 힘 있는 걸음으로 무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행사장 문을 막아서고, 일부는 객석 사이를 가로질러 김태준의 퇴로를 차단했다.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단단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내 어머니를 평생 불행 속에 살게 하고, 이제는 내 동생들마저 없애려 했나?”
준서 오빠가 무대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올라섰다. 그의 모든 발걸음이 강한서와 김태준의 심장을 짓밟는 망치 소리처럼 울렸다. 그는 강한서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피 냄새와 증오가 뒤섞여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네가 빼앗아 간 그 모든 것, 이제 돌려받을 시간이야.”
강한서는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닥쳐! 이 모든 건 내 거였어! 원래부터!” 하지만 그는 준서 오빠의 멱살을 잡기도 전에, 그의 뒤를 따르던 남자들에게 양팔을 붙잡혀 무대 바닥에 무릎 꿇려졌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피로가 가득했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빛만은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그는 내게 다가와 떨리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체향과 함께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살아있었다. 정말로.
“미안하다. 너무 늦게 와서.”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었다. 그 순간, 행사장 정문이 활짝 열리며 경찰 특공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무대 위아래의 모든 것을 제압했다.
김태준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와 준서 오빠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체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오만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끝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시작일 뿐이다.”
그의 저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화려했던 파티는 가장 눈부신 파멸로 막을 내렸다.
***
두 달 뒤,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부서져 내리는 병원 옥상 정원에서 나는 휠체어에 앉은 준서 오빠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그날의 상처는 깊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김태준의 수하가 그를 내리쳤을 때, 머리 대신 어깨를 강타당한 것이 천운이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내가 받았던 의문의 전화,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과거 김태준의 계략에 빠져 모든 것을 잃었던 SJ 그룹의 전직 임원이었고,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김태준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잃었을 터였다.
“이제 혼자서도 걸을 수 있는데, 언제까지 밀어줄 생각이야.”
준서 오빠가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기분 좋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오빠가 재활 훈련 빼먹지 않게 감시하는 중이거든요, 환자분.”
내 앙칼진 대꾸에 그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정원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겼다. 그날 이후,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SJ 그룹의 추악한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김태준과 강한서는 수십 개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터였다.
나를 26년간 속여온 박 원장님도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내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지만,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빈 씨는… 만나봤어?”
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제. 많이 놀랐지만… 좋은 사람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따뜻한 사람.”
지난주,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망설였던 걸음을 옮겼다. 이수빈, 나의 쌍둥이 언니를 만나러 갔다. 병원 카페의 마주 앉은 우리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오래 걸렸네, 만나기까지.’ 담담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더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26년의 세월을 아쉬워하기보다, 앞으로 함께할 날들을 이야기했다.
“잘 됐네.”
준서 오빠가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니, 문득 묻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오빠. 그날 보육원에서… 나한테 왜 그랬어? 왜 나만 도망치게 했어?”
내 질문에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그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부채감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평생 널 미워하고 원망했어. 내 모든 불행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모든 게 내 착각이고, 넌 나보다 더한 지옥 속에서 혼자 버텨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그래서 최소한 너라도, 이 지옥에서 빠져нага게 해주고 싶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의 고백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우리는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입히며, 결국에는 서로의 유일한 구원이 되기까지.
나는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이제 그런 생각하지 마. 오빠는 나한테 빚진 거 없어. 오히려 내가 받은 게 더 많아. 오빠가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무너졌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더 이상 가짜 오빠와 동생이 아닌,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그의 눈빛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하린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성을 붙이지 않은, 오롯이 나의 이름이었다.
“나… 너를….”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저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여기서 연애하고 있었네!”
수빈 언니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는, 어색한 표정으로 서류 가방을 든 영수가 서 있었다. 언니와 영수는 그날의 사건을 계기로 몇 번 만나더니, 제법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준서 오빠는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서 손을 떼고 헛기침을 했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일 년 뒤 가을.
나는 ‘햇살 보육원’의 낡은 간판 대신, ‘햇살 드림 재단’이라는 새 간판이 걸린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박 원장님이 떠난 보육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지만, 준서 오빠가 SJ 그룹의 사회 공헌 재단을 통해 이곳을 인수해 새롭게 단장했다. 나는 그 재단의 이사가 되어, 나와 같은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꿈을 꿀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시작했다.
“윤 이사님! 여기서 뭐 하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말끔한 수트 차림의 준서 오빠가 서 있었다. 그는 이제 휠체어 없이도 완벽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는 그룹의 회장 자리에 올라, 김태준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회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냥. 옛날 생각나서.”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평화롭고, 완벽한 오후였다.
“이제 ‘강하린’도, ‘윤하린’도 아니네. ‘윤 이사님’이라니.”
그가 장난스럽게 놀렸다.
“회장님이야말로. 아직도 오빠라고 부르기가 어색하네요.”
“그럼 다른 걸로 부르든가.”
그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일 년 전, 병원 옥상에서 그가 하려다 만 말이 떠올랐다.
“나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뭘요?”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평생 옆에서 듣고 싶은데. 내 이름.”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따스한 가을바람, 그리고 그의 다정한 입맞춤. 길고 길었던 악몽의 끝에서, 나는 마침내 나의 진짜 행복을 찾았다.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었다. 그 끔찍하고도 찬란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서 있었다. 이제는 내가,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