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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스치자마자, 이서연은 손가락으로 잔을 꽉 쥐었다. 유리잔 가장자리가 손바닥에 파고들며 차가운 감촉이 올라왔다. 루프탑 바는 한여름 밤인데도 공기가 끈적였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단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저 남자, 이름이 뭐였지?”
옆에 앉은 동료가 속삭였지만,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현. 한강그룹 전략팀장. 오늘 밤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신도시 개발 입찰서. 그녀가 3개월 동안 준비한 서류가, 저 남자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왔다.
강현은 바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팔뚝에, 문신처럼 희미한 흉터가 하나 보였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는 없었다. 대신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숨을 내쉬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이서연 대표님.”
그가 먼저 다가왔다.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마치 협상 테이블에서 쓰는 톤 그대로였다.
“강 팀장님. 오늘은 왜 혼자 오셨죠?”
“같이 온 사람이 있었는데, 곧 떠났습니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두 사람 사이 거리는 한 뼘 남짓. 서연은 무릎 위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현의 시선이 그 손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입찰서, 내일 오후 2시가 마감이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시죠?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서연은 웃었다. 입술만. 눈은 웃지 않았다.
“팀장님도 여기 계시니까요.”
강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넥타이가 풀린 셔츠 깃에서, 희미한 남성 향이 퍼졌다. 시원한 우디 계열. 그러나 그 아래로, 땀에 젖은 피부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한번 붙어보시죠. 누가 이기는지.”
대화가 끝나자마자, 바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음악이 커졌다. 강현은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을 지나쳤다. 어깨가 스치는 순간,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두 번째 장면은 다음 날 오후, 회사 회의실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화면을 가리키며 발표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손등에 맺힌 땀방울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이 지역은 지하수 유입이 심합니다. 기존 설계로는 2년 안에 균열이 생길 확률이 68퍼센트입니다.”
강현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발표가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 데이터, 어디서 나왔습니까?”
“저희 연구소에서 직접 측정한 겁니다.”
“우리 쪽 측정치랑 다르네요.”
그는 자신의 태블릿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화면에 떠 있는 그래프가 서연의 것과 달랐다. 차이가 12퍼센트. 그 차이 때문에 입찰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이 데이터, 수정된 건가요?”
서연의 질문에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웃었다. 웃음이 입술 끝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 끝나고 이야기하죠. 단둘이.”
회의가 끝난 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강현이 서연의 팔목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피부가 닿는 순간, 서연의 숨이 멎는 듯했다. 강현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에어컨이 켜진 엘리베이터 안인데도, 그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데이터. 어디서 났는지 솔직히 말해 보시죠.”
“팀장님 데이터가 잘못된 겁니다.”
강현은 서연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엘리베이터 벽이 등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강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서연의 뺨에 닿았다.
“이서연 대표. 당신, 3년 전 그 사건 기억나십니까?”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강현의 손목을 잡아 뗐다. 손가락이 떨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른 척하지 마세요. 그때 당신이 제출한 보고서,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서연을 붙들고 있었다.
“오늘 밤, 내 사무실로 오시죠. 아니면 내일 아침 신문에 그 보고서가 실릴 겁니다.”
서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었다. 주차장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그녀의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뒤에서 강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서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시죠?”
“이서연 대표님. 저는 강 팀장님의… 전 비서입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차가웠다.
“강 팀장님께서, 대표님께 전해 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3년 전 보고서, 사실은 대표님께서 조작한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대신… 누가 조작했는지, 그 사람이 지금 강 팀장님 옆에 있다는 것도 압니다.”
통화가 끊겼다. 서연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핸들 표면이 미끄러웠다. 땀 때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백미러 너머, 주차장 모퉁이에서 강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였다.
문자 아래에 첨부된 사진이 하나 있었다. 3년 전 보고서 표지. 그리고 그 아래, 강현의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연은 시동을 걸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핸들 위에서 멈췄다. 주차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