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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주차장 모퉁이에서 준호의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아스팔트에 스치는 구두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그녀의 긴 흑발이 바람에 살짝 흩어졌다. 준호는 여전히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하늘을 정확히 겨냥했다.
“대표님, 여기서 만나다니 운이 좋군요.”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뒤로 숨겨진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하늘은 가방 끈을 단단히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강 팀장님, 전화는 왜 거셨죠?”
준호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셔츠 소매 아래 근육이 움직였다. 체온이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3년 전 보고서, 진짜 조작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으시다면 따라오시죠.”
하늘은 대답 대신 준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의 체취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우디 향과 땀의 미묘한 섞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준호가 버튼을 눌렀다. 32층. 그의 사무실이 있는 층이었다. 하늘은 벽에 등을 기대며 손목을 문질렀다. 아직 그의 손아귀 자국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데이터 차이 12퍼센트. 그게 우연일 리 없죠.”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하늘의 입술을 스치듯 지나갔다.
“팀장님 쪽 데이터가 왜 다른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
하늘의 대답은 짧았다. 준호는 웃었다. 미소가 눈까지 닿지 않았다.
“오늘 밤, 서로 카드를 조금씩 보여주는 게 어떨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준호가 먼저 나갔다. 하늘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복도 조명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넓은 어깨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준호가 하늘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살짝 당기는 힘이 있었다. 하늘은 저항하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소영 씨가 보낸 메시지, 받으셨습니까?”
준호가 책상 모서리에 기대며 물었다. 하늘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치마 끝이 허벅지 위로 살짝 올라갔다. 준호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
“소영은 제 조력자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준호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밀었다. 화면에는 3년 전 보고서가 떠 있었다. 그의 서명이 선명했다.
“그때 당신이 제출한 자료, 사실은 세민 쪽에서 조작된 거였죠. 그런데 왜 당신 이름으로 올라갔습니까?”
하늘의 손이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가죽을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질문, 세민 씨한테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체격이 가까워질수록 방 안 온도가 올라가는 듯했다. 그는 하늘의 앞에 멈춰 섰다.
“세민은 제 경쟁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과는 다르죠.”
준호의 손이 하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따뜻한 손가락이 피부에 닿았다. 하늘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접촉은 여기까지로 하죠. 입찰서 내용부터 확인합시다.”
두 사람은 책상 앞에 앉았다. 서류가 펼쳐졌다. 준호가 한 장씩 넘기며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지하수 유입 문제, 당신이 지적한 부분은 맞습니다. 그런데 제 데이터는 세민이 수정한 겁니다.”
하늘은 서류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종이 질감이 거칠게 느껴졌다.
“그걸 왜 지금 말하시는 거죠?”
준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 같은 열기가 스쳤다.
“당신이 진실을 말할 때까지, 계속 붙잡아 둘 생각입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소영이 들어왔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하늘아, 여기 있었구나! 세민 씨가 급하게 찾던데?”
소영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준호를 살짝 경계했다. 하늘은 소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민 씨가 왜?”
“입찰서 수정안, 오늘 밤까지 제출하래. 안 그러면 포기각이라고.”
준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도시 야경이 펼쳐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세민, 지금 당장 여기로 와.”
준호의 통화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하늘은 소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왔다.
“소영, 준호 쪽 데이터가 세민 때문에 바뀐 거 같아. 그런데 왜 준호가 그걸 말하는지 모르겠어.”
소영은 하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하늘, 조심해. 준호 씨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복도 끝에서 세민이 나타났다. 그의 차가운 미소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세민은 하늘을 보며 한마디 던졌다.
“이서연… 아니, 하늘 대표. 3년 전 그 보고서, 당신이 조작했다는 증거를 내가 가지고 있소.”
하늘의 발이 멈췄다. 세민은 준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준호와 세민의 시선이 부딪혔다.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세민, 왜 갑자기 나타났지?”
준호의 질문에 세민은 웃으며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새로운 데이터가 떠 있었다. 3년 전 보고서의 원본 파일이었다.
“준호, 당신이 하늘을 끌어들이려는 이유, 이제 알겠군. 그 파일, 내일 아침 신문에 실리기 전에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할 텐데.”
하늘은 복도에 선 채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준호의 주먹이 테이블을 짚고 있었다. 세민의 도발적인 미소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소영이 하늘의 귀에 속삭였다.
“저 파일, 진짜 원본이면… 당신 비밀이 다 드러나는 거야.”
하늘은 고개를 돌려 세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준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세민, 그 파일 어디서 났지?”
준호의 물음에 세민은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가 준 거요. 3년 전, 하늘 대표가 직접 넘겼다고.”
하늘의 손이 소영의 팔을 놓쳤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숨이 막히는 순간, 준호의 시선이 하늘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 섞인 감정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세민은 테이블 위에 파일을 던졌다. 종이가 흩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준호는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세게 눌렀다.
“하늘,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되는 거야.”
준호의 마지막 말이 방 안을 울렸다. 세민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늘은 복도에 서서 안을 바라보았다. 소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나 하늘의 눈은 여전히 세민의 태블릿 화면을 향해 있었다. 그 화면 속 파일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