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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제11화: 거미줄 위의 붉은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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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벨라의 손가락에 끼워진 루비 반지가 촛불 빛을 삼키고, 내 시야의 모든 것을 그 지독한 핏빛으로 덮어버렸다. 주변의 소음, 현란한 음악, 가면 아래 들뜬 웃음소리들이 일순간에 멀어졌다. 귀 안에서 내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만이 거대한 강물처럼 세차게 울렸다. 허리춤에 찬 단검의 손잡이가 마치 내 몸의 일부인 양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죽여.

머릿속에서 5년간 나를 지배해 온 용병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저 여자의 목을 긋고, 반지를 빼앗아. 진실을 알아내.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찰나의 순간, 내 몸은 그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육이 수축하고, 호흡이 멎었다. 눈앞의 벨라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내 과거를 향한 문을 쥔 열쇠에 불과했다.

“진정하십시오, 그림자.”

귓가에 얼음 조각처럼 파고드는 이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칼을 뽑았을 것이다. 그의 손이 내 팔을 붙잡는 감촉은 아주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제지에, 미쳐 날뛰던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폐부로 들어온 공기가 칼날처럼 차가웠다.

벨라의 눈이 가면 너머에서 흥미롭다는 듯이 빛났다. 그녀는 내 안에서 일어난 짧고 격렬한 폭풍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욱 짙은 호선을 그렸다.

“어머, 손님. 제 반지가 꽤나 마음에 드셨나 봐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비매품이랍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완벽하게 꿰뚫어 본 자의 오만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팔을 붙잡은 이안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벨라를 마주 보았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끓어오르는 용암에서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빙하로 그 형태를 바꿨을 뿐이었다.

“입장료를 정정하지.”

내 목소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차갑게 울렸다.

“내 비밀은 보석의 행방 따위가 아니야. 마담 엘라라를 향한 질문, 바로 그거다.”

나는 턱짓으로 그녀의 반지를 가리켰다.

“그 반지의 출처. 내가 그걸 사겠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내 선언에, 벨라의 가면 아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내가 단순한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눈에 서린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모든 것을 불사를 준비가 된 자의 집념이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요염하게 몸을 돌렸다.

“……마담께서 당신을 기다리실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는 더 이상 우리를 시험하지 않았다. 나는 방금, 이곳에서 통용되는 가장 값비싼 화폐를 지불한 셈이었다. 내 목숨을 건 진심을.

***

벨라가 안내한 곳은 살롱의 화려한 벽 뒤에 숨겨진 좁고 어두운 복도였다. 향락의 냄새는 사라지고, 낡은 양피지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밖의 소음은 두꺼운 벽에 막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가려진 문 앞에 섰다. 벨라는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우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마담께서는 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가면은 그대로 쓰고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쓸데없는 질문은 목숨을 단축시킬 뿐이라는 걸 명심하시고요.”

그녀는 경고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안과 나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면 아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에게 ‘괜찮겠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처럼 답답하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육중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예상외로 넓고, 수천 권은 됨직한 책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기는 서늘했고,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흑단나무 책상 위에서 흔들리는 촛불 몇 개가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리고 그 책상 뒤, 그림자 속에 잠긴 높은 의자에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는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국 모든 비밀의 거미줄, 그 중심이었다.

“마르셀이 보낸 쥐새끼들이로군.”

갈라지고 메마른, 성별조차 가늠하기 힘든 목소리가 그림자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마치 낡은 양피지가 서로 스치는 소리 같았다.

“감히 내 거미줄을 흔든 대가가 무엇인지는 알고 찾아왔겠지?”

“질문을 하러 왔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가는 치를 생각이다.”

이안이 한 걸음 나서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초승달과 뱀. 그리고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의 목을 감은 뱀. 그 표식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해다오.”

그림자 속 인영은 잠시 침묵했다. 방 안에는 촛불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내 긴장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이윽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담하군. 5년간 그 누구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던 이름을, 고작 쥐새끼 두 마리가 지껄이다니.”

의자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며, 마담 엘라라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였다. 은빛으로 센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뼈만 남은 듯 앙상한 손가락에는 어떠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숯처럼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동자는, 마치 세월의 모든 비밀을 빨아들인 심연과도 같았다.

“그 표식은 ‘황혼의 교단(The Order of Twilight)’이라 불린다.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자들이지. 황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믿는 유일한 여신을 옥좌에 앉히려는 광신도 집단이야. ‘초승달과 뱀’은 그 교단의 하수인일 뿐, 진짜 몸통은 따로 있다는 소리다.”

황혼의 교단.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2황후가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면 그녀조차 그들의 장기 말에 불과한 것인가.

“그럼 이 반지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내 가면과 위장을 꿰뚫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선황후 폐하의 유품이지.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감쪽같이 사라졌던.”

“어떻게 그 반지를 벨라가….”

“그 반지는 도둑맞은 게 아니다.”

마담 엘라라가 내 말을 잘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감정도 없이 건조했다.

“‘팔린’ 것이지. 선황후 폐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황실의 시녀장이었던 엘레노어 백작 부인의 손에 의해서.”

엘레노어 백작 부인. 어머니가 살아생전 친자매처럼 아끼고 의지했던 사람. 내가 ‘이모’라고 부르며 따랐던 사람. 그녀가…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넘겼다고? 심장이 바닥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배신감에 숨이 막혀왔다.

“그 반지는 교단이 주최하는 비밀 경매에 나왔고, 아주 비싼 값에 어떤 자에게 팔려나갔다. 벨라는 그저 그 낙찰자에게 잠시 반지를 빌려 끼고 있는 것뿐이지. 일종의 과시랄까.”

“낙찰자가 누군지 알려줘.”

“그건 내 정보의 영역 밖이다. 하지만 경매를 주관한 자들은 알지. 수도의 모든 뒷거래를 주무르는 ‘땅거미 상단(The Twilight Syndicate)’. 황혼의 교단이 운영하는 자금줄이다.”

땅거미 상단. 엘레노어 백작 부인.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을 향해 맞춰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었다. 제국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거대한 음모의 일부였다.

“이제 내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마담 엘라라의 눈이 다시 이안을 향했다.

“발레리우스의 늑대. 네 아비는 죽기 직전 무엇을 남겼지? 그가 황혼의 교단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그게 내가 받을 정보다.”

이안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그의 정체는 물론,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까지 꿰고 있었다. 이 노파 앞에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뱀을 조심해라’. 그리고 독이 묻은 보고서 조각. 그게 전부요.”

“보고서의 내용은?”

“북부 국경 너머, 잊혀진 신전에서 수상한 자들이 집회를 연다는 내용이었소. 제국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양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고….”

그 순간이었다. 마담 엘라라의 앙상한 손이 책상 위 작은 종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방구석의 그림자 속에서 벨라가 다시 나타났다.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해 드려라. 오늘의 거래는 여기까지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

내가 항의하려 했지만, 벨라의 뒤에서 나타난 거구의 사내 두 명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우리는 알아낼 것을 알아냈고, 그녀 역시 원하는 것을 얻었다. 우리는 순순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마담 엘라라의 마지막 말이 등 뒤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복수는 뜨거울 때 해야 제맛이지만, 식어버린 복수는 독이 되는 법이지. 명심해라, 죽음에서 돌아온 황녀여.”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다시 돌아온 살롱의 소음은 귀를 찢을 듯 시끄러웠다. 우리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비에 젖은 뒷골목을 걸었다. 엘레노어 백작 부인의 배신, 황혼의 교단, 땅거미 상단.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쩔 겁니까.”

이안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단서를 얻었지만, 그 실체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엘레노어 백작 부인을 찾아가야 해. 그 여자의 입에서 모든 걸 실토하게 만들어야지.”

“백작 부인은 황실의 원로입니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우리가 먼저 잡힙니다. 더 철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어! 놈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 지금 이 순간에도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내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이안이 내 앞을 막아서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냉정해지십시오! 지금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놈들의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복수심에 미친 괴물이 아니라, 이 판을 뒤집어야 할 군주입니다. 잊었습니까?”

그의 푸른 눈동자가 빗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며 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의 말은 찬물처럼 내 머리 위에 쏟아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옳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차가워져야 했다. 더 계산적이어야 했다.

“……미안하다.”

내가 간신히 내뱉었다. 이안은 내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어두운 골목의 저편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허름한 여행자 복장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비범했다. 낯익은 실루엣이었다.

“……엘리안?”

내 입에서 놀라움 섞인 이름이 흘러나왔다. 수도 외곽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야 할 나의 충직한 동료, 엘리안이었다. 그가 왜 이곳에? 그의 얼굴은 공포와 다급함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찾았습니다, 대장! 드디어… 놈들의 다음 목표를…!”

엘리안은 우리 앞에 멈춰 서서,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양피지 조각이 쥐여 있었다. 그가 내민 양피지에는 암호로 된 몇 개의 단어와 함께, ‘초승달과 뱀’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표식 아래, 다음 암살 목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체 누군데 그래!”

이안이 초조하게 물었다. 엘리안은 고개를 들어, 절망적인 눈빛으로 이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이자… 북부 발레리우스 대공가의 유일한 혈육.”

엘리안의 마지막 말은 사형 선고처럼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이솔데 데 발레리우스. 바로 오늘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