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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제10화: 독이 든 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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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젖은 옷이 체온을 앗아가는 감각보다, 이안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은 단추가 내뿜는 냉기가 더 지독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제국의 독수리, 그 한쪽 목을 칭칭 감고 있는 교활한 뱀.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황실에 대한 모독이자, 제국의 심장부에 독사의 둥지가 있음을 알리는 섬뜩한 선언이었다.

“함정이야.”

내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서로 엉켜들었다. 마르셀이라는 자는 우리를 시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큰 덫으로 유인하는 미끼인가?

“그렇겠죠.”

이안이 대답했다. 그는 단추를 쥔 손을 천천히 오므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분노나 당혹감이 아닌, 복잡한 계산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함정입니다. ‘마담 엘라라’는 수도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그 여자를 통하지 않고는 ‘초승달과 뱀’의 꼬리조차 잡을 수 없을 겁니다. 마르셀이라는 놈은 그걸 알고 이 초대장을 던진 거겠죠.”

그의 말이 맞았다.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치밀었지만, 동시에 내 안의 냉철한 승부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독이 든 성배였다. 마시는 순간 죽을 수도 있지만, 마시지 않으면 영원히 갈증 속에서 헤매야만 하는.

“이 문양….”

내가 오므린 그의 주먹을 노려보며 말했다.

“황실 내부의 세력이라는 뜻이야. 2황후 혼자만의 짓이 아닐 수도 있어.”

“황실의 권위를 탐하는 자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2황후의 가문인 로렌시아 후작가는 야심은 크지만, 이토록 대담한 상징을 내세울 만큼의 배짱이나 힘은 없습니다. 그 배후에 더 거대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겠죠.”

이안의 분석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둠이 내린 강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에 아버지의 죽음을 되새기는 깊은 고통과, 모든 것을 불사를 듯한 증오가 함께 어렸다.

“어쩌면… 제 아버지께서 막으려 했던 것이 바로 저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 앞에는 단 하나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뱀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길. 나는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삿대를 주워 들었다. 이안은 말없이 밧줄을 풀었다. 작은 나룻배가 삐걱이며, 수도를 향한 검은 강물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등 뒤로 우리가 탈출한 도시, 세렌디아의 불빛이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그 불빛은 마치, 우리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처럼 아련해 보였다.

***

수도까지의 길은 지옥이었다. 우리는 낮에는 썩은 나무 밑이나 바위틈에 숨어 잠을 청했고, 밤이 되면 짐승처럼 산길을 타고 움직였다. 황태자의 수색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집요했다. 큰길 곳곳에 검문소가 세워졌고, 마을마다 우리의 인상착의를 그린 수배서가 나붙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은 구경도 못 하고, 차가운 계곡물과 딱딱한 육포로 허기를 달랬다.

“이쪽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이안이 내게 물통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지친 기색 하나 없었지만,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나는 말없이 물통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타는 듯한 목구멍을 적셨다.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낡은 사냥꾼의 오두막에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위로, 서로의 지친 얼굴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나는 무심코 팔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레오의 검에 다친 것이 아니라, 파편에 긁힌 상처였다. 하지만 상처의 통증보다, 레오의 마지막 말이 더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부디, 제국의 빛이 되어주십시오.’ 아서 오라버니의 시험. 그 안에 담긴 희망. 나는 그 모든 것을 비웃고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감상에 젖는 순간, 복수는 무뎌지고, 나는 다시 과거의 무력한 카일루스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뜨렸다. 그는 불을 쬐며 단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네놈이 알 바 아니야.”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모닥불의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한참 만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때문입니까.”

내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내 반응을 보고 확신한 듯, 말을 이었다.

“그는 당신을 시험했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모순적이죠. 제국의 황태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뿐인 동생을 잃고 싶지 않은 오라버니이기도 하니까요. 인간이란 본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의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죠.”

“네놈이 인간의 마음을 논하다니, 웃기는군.”

“제 아버지는 저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발레리우스의 늑대는 차가운 이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 심장에는 뜨거운 불을 품어야 한다고. 그 불이 꺼지는 순간, 늑대는 그저 길 잃은 개가 될 뿐이라고요.”

그는 칼을 품에 넣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모닥불에 일렁였다.

“황녀 전하의 심장에도 불이 있습니다. 복수라는 이름의 불이죠. 하지만 그 불꽃 아래, 아주 희미하게 다른 빛이 남아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레오 기사를 살려주었을 때의 그 빛을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 안에는 아직 ‘카일루스’가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 빛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복수심에 미쳐버린 괴물이 아니라,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군주라는 증거이니까요.”

그의 말은 위로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계산이었을까. 나는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든 그의 옆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의 말 한마디가 꺼져가던 내 안의 무언가를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지피고 있었다.

***

닷새 후, 우리는 마침내 제국의 심장, 수도 아르카디아에 도착했다. 행색이 남루한 난민처럼 위장한 우리는, 역병 환자를 피하듯 우리를 멀리하는 인파를 뚫고 악취 나는 빈민가를 가로질렀다. 거대한 황궁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굶주린 자들의 신음과 귀족들의 탐욕이 시궁창 냄새처럼 배어 있었다.

마르셀이 남긴 초대장에 적힌 장소는 수도의 가장 화려하지만, 동시에 가장 음습한 유흥가에 위치한 ‘금빛 새장(The Gilded Cage)’이라는 곳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고급 주점이었지만, 뒷문으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퇴폐적인 향락과 비밀스러운 거래가 뒤섞인, 가면을 쓴 귀족들과 부호들을 위한 지하 살롱이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입구를 지키는 덩치 큰 사내가 우리를 막아섰다. 이안이 말없이 마르셀의 초대장을 내밀었다. 사내는 초대장의 문양을 확인하고는, 우리에게 기괴한 새 모양의 가면 두 개를 건넸다.

“오늘 밤의 유희를 즐기시길.”

가면을 쓰자 시야가 갑갑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정체를 숨길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살롱 내부는 어둡고 소란스러웠다. 현악기 연주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가 뒤섞여 머리를 울렸다. 공기 중에는 값비싼 향수와 독한 술, 그리고 숨 막히는 욕망의 냄새가 떠다녔다.

“마담 엘라라는 어디에 있지?”

내가 이안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이런 곳의 주인은 결코 모습을 먼저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녀를 찾아야 할 겁니다. 아니면… 그녀가 우리를 찾아오게 만들거나.”

우리는 바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살롱 안의 모든 사람들을 관찰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짓과 말투에서 계급과 성격이 드러났다. 누군가는 돈을 잃고 절망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금지된 마법 약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국의 모든 추악한 비밀이 모이는 하수구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한 여인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화려한 공작새 깃털로 장식된 가면을 쓰고 있었고, 몸에 딱 붙는 붉은 드레스는 그녀의 관능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녀는 마담 엘라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의 지배인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두 분은 처음 뵙는 얼굴이군요. 저는 이곳의 지배인, 벨라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뱀의 독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우리를 훑었다. 특히 내 허리춤에 찬 단검 손잡이에서 잠시 머물렀다.

“마담 엘라라를 만나러 왔다.”

이안이 간결하게 용건을 말했다. 벨라는 붉은 입술을 호선으로 그리며 웃었다.

“마담께서는 아무나 만나지 않으신답니다. 특히, 초대장의 주인도 아닌 불청객은 더더욱요.”

그녀의 말은 우리를 떠보는 것이었다. 마르셀의 초대장은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었지만, 마담을 만나는 자격 증명이 되지는 못했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마르셀의 ‘선물’을 받고 온 손님이다. 마담께서도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 차가운 대꾸에 벨라의 눈웃음이 잠시 멎었다. 그녀는 잠시 우리를 뜯어보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마르셀 님의 손님이라…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죠. 마담께서도 두 분의 방문을 예상하고 계셨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진심’을 보고 싶어 하셨죠.”

“진심?”

“네. 이곳 ‘금빛 새장’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장료가 필요하거든요. 돈이나 보석 따위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밀’이랍니다. 당신들이 가진 가장 값비싼 비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 하나. 그것이 입장료입니다.”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비밀. 내게는 비밀밖에 없었다. 내가 죽음에서 돌아온 황녀라는 것.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쫓고 있다는 것.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치명적인 비밀들이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를 시험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는지, 우리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안이 나를 만류하려는 듯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 비밀을 사지. 5년 전, 황궁의 연회에서 사라진 ‘엘릭시르의 눈물’. 그게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고 있어.”

‘엘릭시르의 눈물’. 고대 마법의 힘이 담겨 죽어가는 자도 살린다는 전설의 보석. 5년 전, 2황후가 주최한 연회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 죄는 억울하게도 당시 경비를 맡았던 기사단장, 즉 알렉산더 경에게 돌아갔었다. 모두가 그가 훔쳐 달아났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벨라의 눈이 가면 너머에서 가늘어졌다. 흥미롭다는 빛이 역력했다.

“호오, 그 전설의 보석을요? 알렉산더 경이 가지고 있다는 건 온 제국이 아는 사실인데.”

“그건 거짓이야. 진짜 범인은….”

내가 진실을 말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벨라가 우아하게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거대한 루비 반지가 촛불 빛을 받아 섬광처럼 빛났다.

내 숨이 멎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시선은 그녀의 손가락에, 그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교한 백금 세공에, 제국 북부에서만 나는 희귀한 핏빛 루비가 박힌 반지.

잊을 수 없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날, 끼고 계셨던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