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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제23화: 가장 어리석은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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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사라졌다.

아니, 호흡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하르가 푸른빛 장막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폐를 채우던 차가운 밤공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했다. 대신 그를 감싼 것은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無)의 감각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온도도 없는 순수한 공간. 그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온 우주의 유일한 소음인 것처럼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었다. 그곳은 동굴도, 숲도, 그 어떤 지상(地上)의 공간도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허공에, 무수한 수정 기둥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각각의 기둥은 스스로 빛을 내뿜으며, 서로의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켜 무한한 빛의 프리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현실의 물리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오직 마력과 지성만으로 직조된 세계였다.

그 수정 기둥들의 가장 중심, 가장 거대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얼음 결정체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인간의 형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은하수처럼, 수억 개의 빛나는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지성의 성운(星雲)이었다. 백색의 마녀. 용족의 역사보다 오래된 존재의 본질은, 저토록 비인간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왔는가, 용의 마지막 아이여.』

목소리는 사방에서, 아니, 그의 정신 속에서 직접 울렸다. 수정 기둥들이 그 목소리에 맞춰 함께 공명하며, 공간 전체가 거대한 악기처럼 떨렸다.

"거래를 하러 왔다."

자하르는 숨 막히는 위압감에 짓눌리면서도, 꼿꼿이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산소 없는 공간에서 기이하게도 선명하게 울렸다. 이곳에서의 대화는 성대의 떨림이 아닌, 의지의 파동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네 영혼을 새로운 그릇으로 삼으라는 제안. 참으로 흥미롭지. 필멸자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의 연산 오류는, 언제나 내 예측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오는군.』

마녀의 목소리에는 경탄도, 조롱도 없었다. 그저 새로운 데이터를 관찰하는 과학자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려줄 수 있나? 그녀의 영혼에서 공허를 완전히 분리하고, 그 대가로 나를 취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하르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흔들렸다. 그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가능하다.』

마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여인의 영혼은 이미 균열이 심해, 공허를 담기에는 불안정한 그릇이 되었다. 허나 네 안에는 천 년의 저주를 견뎌낸 용의 피와, 꺾이지 않은 강인한 의지가 잠들어 있지. 훨씬 더 안정적이고, 훨씬 더 넓은 그릇이다. 공허 또한 더 나은 거처를 마다하지 않을 터.』

마녀의 말은 그의 제안이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심장에 차가운 비수를 꽂았다. 더 나은 그릇. 그는 기꺼이 괴물이 되기 위해 제단 위에 오른 제물에 불과했다.

"조건은?"

『간단하다. 추출과 주입. 그 여인의 영혼에 뿌리내린 공허의 씨앗을 뽑아내 너에게 옮겨 심을 것이다. 과정은 고통스러울 게다. 네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고, 기억과 감정을 조각내어 그 틈새에 허무를 채워 넣는 작업이니. 너는 아마...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상관없다."

자하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뇌리에 루아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햇살 같던 그녀의 미소. 그것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가 안전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해준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

『좋다. 거래는 성립되었다.』

마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자하르의 발밑 수정 바닥에서부터 수십 개의 빛나는 촉수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차가운 불꽃처럼 그의 몸을 휘감고, 속박하고,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크윽...!"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물리적인 아픔이 아니었다. 영혼이 통째로 해체되는 듯한 감각. 그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용의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보았던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에게 검을 배우던 날의 땀 냄새, 그리고... 잿빛 숲에서 처음 만났던,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루아의 갈색 눈동자.

그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빛을 잃고, 차가운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얼굴만은 잊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루아. 내 빛. 내가 너를...

그의 의식이 까마득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하아."

가느다란 숨소리와 함께, 루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동굴 안은 아직 어두웠지만, 입구 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여명이 사물의 윤곽을 구분하게 해주었다.

몸이... 가벼웠다.

온몸을 짓누르던,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그 지독한 냉기가 사라져 있었다. 심장을 옥죄던 불길한 맥박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길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믿을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목에 걸려 있어야 할 초승달 펜던트가, 그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그녀가 혼란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동굴 입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그 미련한 분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카엘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발레리우스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왕자 전하께서... 사라지셨네."

루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입구로 향했다. 동굴 밖으로 나선 두 명의 용족 수호자는 심각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은, 이제는 평온한 푸른빛으로 돌아온 백색의 마녀의 장막이었다.

"왕자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두 남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아가씨...?"

발레리우스의 금빛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는 루아의 얼굴을, 마치 유령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샅샅이 훑었다. 그녀의 입술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보랏빛이 사라져 있었다. 잿빛이던 뺨에는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동자가 변해 있었다. 어젯밤까지 그녀의 눈을 지배하던 공허한 절망의 빛은 온데간데없고, 예전의 맑고 총명한 갈색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몸이... 괜찮아진 겐가?"

카엘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가시 돋친 냉소 대신,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눈을 떠보니... 괜찮아졌어요. 저를 짓누르던 모든 게 사라졌어요. 그런데 왕자님은... 왕자님은 어디에..."

루아는 말끝을 흐렸다. 불안감이 심장을 조여왔다. 자신의 몸이 갑자기 좋아진 것과, 자하르가 사라진 것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막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잠깐, 아가씨! 위험하오!"

발레리우스가 외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하르가 저 안으로 들어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 바보 같은 사람이 또다시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한 것이다.

***

장막 앞에 다다른 세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물건 하나였다. 그것은 자하르가 언제나 품 안에 지니고 다니던, 용의 문양이 새겨진 낡은 가죽 주머니였다. 그의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했던. 그는 결코 저것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정말로 혼자 장막 너머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마녀와, 돌이킬 수 없는 거래를 한 것이다.

"이... 이 어리석은 분을 봤나...!"

카엘의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루아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의 주군이 내린, 목숨을 건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기수로서의 무력감과 분노였다.

"왕자 전하..."

루아는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아, 자하르의 유품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가 뒤섞여 심장을 갈가리 찢었다. 왜 자신은 언제나 그에게 받기만 하는 걸까. 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해 희생만 하는 걸까.

발레리우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착잡한 눈으로 고요하게 빛나는 장막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장막의 마력 흐름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거대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거대한 힘이 채워 넣은 듯한 흔적. 거래는 이미 끝난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요하던 장막이 다시 한번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인영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왕자님!"

루아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자하르였다. 그의 옷은 엉망이었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는 분명 두 발로 서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루아는 울면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하지만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아주던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그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를 마주 안는 팔에는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자하르...?"

루아는 불안감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이전의 고통이나 슬픔이 담긴 눈빛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감정도, 기억도, 자아도. 마치 영혼이 깨끗하게 지워진 인형의 유리구슬 같은 눈이었다. 그는 눈앞의 루아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발레리우스가 경악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엘은 검을 뽑아 들 자세를 취하며, 본능적인 위협을 감지했다.

자하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아와 발레리우스, 카엘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처음 보는 낯선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 멎었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저것은...!"

발레리우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하르가 들어 올린 손바닥 위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의 저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순수한 공허의 마력이었다. 그 마력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이내 작은 구(球)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검은 구체는, 주변의 빛과 소리, 공기마저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끔찍한 저주를,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기꺼이 끌어안았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의 텅 빈 눈동자는, 자신이 구하려 했던 세상의 전부였던 여인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했다.